6장 – 구시대로 회귀(回歸)하다
귀경(歸京)
- 정약용은 1799년 2월 황주 영위사(迎慰使)로 임명받으며, 그 해 4월 24일 경직인 병조(兵曹)참지를 제수(除授). 서울로 올라가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바뀌더니 형조(刑曹)참의로 제수(除授)
- 차로 유명한 초의선사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깊었음
-『흠흠신서』는 정약용의 저서(著書) 가운데 대표적 저서이며 형법(刑法)책으로 1822년 간행
- 옥당(玉堂)은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을 달리 이르는 말로 궁중(宮中)의 경서(經書), 사적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그리고 왕의 각종 자문(諮問)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서임
- 정약용은 정조(正祖) 말엽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형제인 정약전을 무고하는 노론(老論)의 공세에 분노를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감
정조(正祖) 의문사하다
- 박제가는 채제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돌아온 뒤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를 저술
- 정조(正祖)가 사경을 헤맬 때 그의 정적이던 대비 정순왕후는 신하(臣下)들을 물리치고 홀로 병구완을 하여 정조(正祖) 사후(死後) 의혹이 읾
- 정조(正祖)의 죽음은 신세대(新世代)가 몰락하고 구세대(舊世代)가 다시 살아나는 반동의 시작이자 개방과 다양성의 문은 닫히고 폐쇄(閉鎖)와 획일(劃一)의 시대가 도래하는 시작
정조(正祖)어찰첩
- 정조(正祖)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정순왕후는 이미 인사권을 행사. 정순왕후를 필두로 노론(老論) 벽파가 정권을 재장악하고 정조(正祖) 치세 24년을 부인하는 과거사 청산 작업에 들어감
정조(正祖) 즉위 당일, 정조(正祖)를 배신하다
- 정조(正祖)가 죽자마자 과거사 청산(淸算)작업이 시작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심환지임
여유당을 지은 뜻
- 정조(正祖)와 정약용은 단순한 군신(君臣)관계를 넘는 동지(同志)이자 가족(家族)이었으며 정조(正祖)는 정약용에 대한 모든 공격을 막아주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음
- 정약용은 소내 고향집에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당호를 지었는데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 라는 뜻으로 『노자』에서 따옴. 정조(正祖)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나타남
- 정조(正祖)와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무덤을 건릉이라고 함
대박해의 문
- 노론(老論) 벽파는 정조(正祖)의 장례절차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모든 정치행위를 묻어버릴 계획이었음
- 그 해 남인(南人)과 시파는 대거 유배형에 처해짐
- 『국장도감의궤』에는 정조(正祖)의 국장에 관한 제반 의식 및 절차를 기록한 책. 정조(正祖)의 상여를 멘 사람들과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나타남.
-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오른 명목상의 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정순왕후가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름
- 정조(正祖) 사후 남인(南人)들을 천주교(天主敎)도로 몰아 죽이기 위한 신유박해 때 이병모는 국청의 위관을 맡아 남인(南人)들을 처벌
7장 – 하늘에 속한 사람 정약종
모든 양반이 배교(背敎)(背敎)할지라도
- 정약종은 부친과 형제들을 떠나 부인 문화 유씨와 첫 부인 이씨 소생의 정철상을 데리고 고향 마재를 떠나 양근의 분원으로 이주
- 정약종은 대부분의 양반 교유들이 천주교(天主敎)를 버릴 때 끝내 신앙을 고수하고 그 결과 고향을 떠나 양근에서 포교함
- 『주교요지』는 조선 천주교(天主敎)(天主敎)인이 쓴 최초(最初)의 교리(敎理)서이며 한글로 쓰여짐
『주교요지』의 세계
- 정약종은 조선인이 쓴 최초의 천주교(天主敎)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해 조선 천주교(天主敎)의 인식 수준을 높임
- 『주교요지』 에는 삼위일체설 및 윤회설 비판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음
유교의 비판에 대한 대응 논리
- 『주교요지』 가 쓰여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유학자들의 천주교(天主敎)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 강림, 수난과 순교, 부활과 승천 등에 대해 묘사하고 설명
정학(正學)으로 알았지 사학(邪學)으로 알지 않았다
- 최필공의 동생 최필제와 천주교(天主敎)도들이 봉헌축일 예배를 보고 있을 때 투전금란에 의해 잡힘
- 1801년 1월 10일 사학(邪學) 엄금하교가 내려지며 전국에서 대대적인 천주교(天主敎)도 검거가 자행
- 정약종은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던 조선 천주교(天主敎)사의 대표적 순교자
8장 – 어둠의 시대
전멸하는 남인(南人)들
- 정약종이 세상을 떠났으나 정순왕후나 노론(老論) 벽파의 목표는 정약종이 아닌 이가환이었음
- 정조(正祖) 19년 조선으로 잠입한 주문모 신부는 6년 동안 추적을 따돌리며 전교하다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자수하여 순교
- 이가환, 이승훈을 비롯해 홍교만, 정철상 등 배교(背敎)하지 않은 여럿이 고문으로, 참형으로 세상을 떠남
- 1801년 신유박해에 대한 정부 측에서 기록한 책 『사학(邪學)징의』 발간
계속되는 비극들
- 대왕대비 김씨와 노론(老論) 벽파에 의해 대검거가 시작된 이래 이들이 체포하려고 가장 열심이었던 인물은 신부 주문모임
- 주문모는 강완숙의 집을 기본 거처로 삼았으나 남대문 안의 권상문, 사축서동의 김씨 집을 옮겨다니며 교세를 확장하다 자수하고 순교
- 강완숙 역시 그 해 5월 22일 형을 받고 처형됨
죽음의 땅, 국청에서
- 위관은 정약용을 엮어 처벌(處罰)하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체포(逮捕)되어 조사하면 할수록 정약용의 혐의(嫌疑)가 벗겨져 나감
- 정약용은 『대학』의 성의 두 글자를 붙들고 매달려 마음을 다스림
- 투옥된 지 19일 만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남
귀양지 장기에서
- 신유박해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어 한 군교 집에서 기거
- 정약용은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농민들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병마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촌병혹치』라는 의서를 저술
- 정약용이 자식을 연달아 홍역으로 잃고 『마과회통』에서 조선 최초로 종두법 소개
황사영 백서사건
-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배론성지에 천주교(天主敎)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살던 조선 최초의 신학교 배론학당을 1855년 설립
- 정약현의 사위였던 황사영은 천주교(天主敎) 박해를 피해 강원도 제천시의 이 토굴에 은거하며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
-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이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참상과 그 대처 방안을 전달하기 위해 작성한 백서로 외국배를 이용하자는 내용이 있어 정부 측을 격노하게 함
9장 – 유배지(流配地)에서
거듭되는 이별
- 정약용과 정약전은 함께 유배길에 올라 나주 율정점에서 헤어지게 됨
- 정약용은 강진에서 거처를 구하지 못하지만 동문 근처 주막집 노파에서 방 한 칸을 빌려 겨우 기거할 수 있게 됨
-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학문의 세계에만 침잠
유배지에서 시킨 자녀 교육
-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세상과 절연했지만 가족만은 그러지 못하고 교육에 대해 고민함
- 다산은 아내가 보내온 색 바랜 다홍치마에 매화와 참새 한 쌍을 그려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등 딸에 대한 애정을 보임
- 1810년 큰아들 학연이 부친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해배의 움직임이 있자, 한 제자에게 자신이 강진을 떠나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냄. 자산으로 머리를 돌리면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는 말에서 형에 대한 다산의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음.
- 1794년, 서울의 죽란(竹欄)서옥(書屋)에서 죽란사라는 시사가 결성됨. 다산을 비롯한 채제공, 이가환, 윤지범, 정약전, 한치응 등이 참여.
-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맏아들 학연, 둘째 아들 학유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교육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 정약용은 그 어느 사대부보다 많은 시를 지었으며 생생한 현실을 담고 있음
- 그의 시는 실제로 시대를 아파하고 있으며 곧 백성들의 고통에 분개하고 있음
- 다산은 「감사론(監司論)」에서 감사를 가장 큰 도적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정조(正祖) 사후 조선은 이미 천명이 떠난 나라로, 이를 표현한 것
10장 – 주역의 세계로 나아가다
상례를 연구한 이유
- 유배 초기 시절 정약용은 예기(禮記)와 상례(喪禮)를 집중 연구하였으며 예학의 대가였음
- 정약용은 예송논쟁에 대하여 소신의 논리를 펼침
제3차 예송논쟁의 조짐
- 허목은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예송논쟁을 시작. 당시 송시열 등 서인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
주역의 세계로
- 정약용은 상례 연구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 되는 주나라 고례(古例)를 고증하는 것이라고 생각
- 정약용은 어릴 때부터 『주역(周易)』을 접해 왔으며 시간이 남아돌던 귀양지에서 『주역(周易)』과 씨름하게 됨
- 다산 정약용은 『주역사전(周易四箋)』을 통해 주역사법에 대해 풀이. 1808년에 간행되었으며 『주역(周易)』의 독서 요지와 사상이 서술
성인들이 주역을 쓴 이유
- 『주역언해』는 『주역(周易)』에 토를 달고 우리말로 직역한 책. 원문을 앞에 싣고 뒤에 언해를 붙였음
- 정약용이 『주역(周易)』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상(象)
- 『역학서언』은 중국의 한,당나라 때부터 당대까지 여러 견해의 역설을 비판,평가한 자료로 다산 역학의 중요 저작인 『주역사전(周易四箋)』의 서론적인 역할을 함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들, 주역사전
- 『주역사전(周易四箋)』은 정약전의 도움을 받아 저술된 책으로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대신 어부들과 어울려 지냈으나 정약용이 『주역(周易)』등에 대해 물어올 때는 놀라운 학문적 식견을 보여줌
- 정약전은 『주역사전(周易四箋)』을 문왕, 주공, 공자 같은 옛 성인들의 도가 정약용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다고 볼 정도로 높이 평가함
왕필은 죽어서 돼지 치는 종놈이 되었다
- 정약용은 왕필의 『주역(周易)』 해석이 끼친 피해가 너무 크다고 보아 그가 죽어서 ‘돼지 치는 종놈’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
주역은 점치는 책이 아니다
- 정약용은 『주역(周易)』이 본래 두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경학가가 정하고 하나는 복서가의 소용이 되었다고 말하고, 복역가의 효용이 된 것에 대해 크게 비판함
- 정약용에게 『주역(周易)』은 점치는 책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늘의 뜻대로 사는 데 도움을 주는 경전이었음
11장 – 생태학자 정약전
송정사의에 담긴 뜻
-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학문에 몰두한 반명,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지에서 어부들과 어울리며 민중들의 삶을 깊게 체험
- 정약전이 조선시대 소나무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송정사의』를 지음.
정약용과 정약전의 학문세계
- 정약전이 사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는동안 ‘복성(復性)재’라는 이름의 서당을 지음
- 정약용이 경학 연구에 몰두한 반면 정약전은 유배 생활 동안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名稱), 형태(形態), 분포(分包), 실태(實態) 등을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김
유배지 형제의 사랑과 슬픔
- 정약용은 우이봉이라는 말을 듣고 우이도에 있는 형님을 그리워 함
12장 – 만남과 헤어짐
혜장선사
- 정약용은 학초를 잃은 이듬해, 1808년 봄 강진현 남쪽의 만덕사 서쪽에 있는 처사 윤단의 산정인 다산으로 이주
- 백련사에서 혜장이란 승려를 만남. 혜장은 전남 해남군 화산면 출신의 승려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대둔사로 출가하여 기벽으로 유명
- 『주역(周易)』에 통달했다고 자부하던 백련사 주지 혜장은 정약용에게 『주역(周易)』을 들은 후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심
- 혜장은 정약용을 만난 이후 불교보다 유학에 심취해 제자들이 ‘김선생’이라고 부르며 미워했다고 전해짐
- 다산은 혜장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아암장공탑명」을 지어 그를 기림
- 정약용에 따르면 혜장은 『주역(周易)』의 세계에 빠진 후 술을 과도하게 마시다 배가 불러 죽었다고 하는데 간경화로 추정
정약전의 죽음
- 정약전이 흑산도에 세운 복성재란 서당은 모래 언덕위에 있다는 뜻으로 사둔서당이라고도 불림
-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진에 가까운 우이도로 가 헤어진 동생을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함
- 정약전이 유배 16년 만에 사망하자 우이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불행한 유배객의 장례식을 치러주었음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 강진에서 보낸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정약용은 오늘날 ‘다산학’이라 불리는 실학의 학문체를 완성
13장 – 고향에 돌아와
자찬 묘지명을 쓴 이유
-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저술하는 것은 지난 인생을 회개하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왜곡되어 전해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려 한 것
- 「자찬 묘지명」은 자기 변명조가 아닌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서술하여 자신의 인생이 그 어ᄄᅠᆫ 이유에서든지 미화되거나 격하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음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 정약용은 그 자신의 몰락보다 시대의 몰락을 더 슬퍼하였음
- 정약용은 토지문제에 있어서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소수 부호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개혁을 주장
- 정약용은 사대부란 신분을 인정하지 않으며 과거응시 자체가 금지되었던 서얼을 등용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전근대적 신분, 지역차별을 철폐하자고 주장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 정약용은 송시열을 비롯해 조선 후기의 유학자(儒學者)들이 절대주의 사상으로 떠받들었던 주희의 경학(經學)사상을 뛰어 넘음
- 다산은 성리학(性理學)의 해석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실천 규범으로 바라봄
- 다산은 인간이 선을 좋아하는 성품의 기호를 길러서 자신의 결단으로 선을 선택하고 실행해가야 한다는 철학정 바탕아래 자주지권(自主之權) 사상을 확립
묘지명을 지은 뜻
- 다산은 자기 자신의 묘지명을 지은 「자찬 묘지명」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묘지명을 저술
- 그의 묘지명 저술에는 천주교(天主敎)도 여부라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일정한 원칙이 있었음
- 다른 사람들의 묘지명을 쓴 것은 먼 훗날의 평가를 위해서, 노론(老論)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사헌부의 계사나 국청의 국문기록이 아닌 묘지명으로 자신과 이들의 인생을 평가받기 위한 것
태워버려도 괜찮다
- 그는 「자찬 묘지명」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라고 말함
- 다산은 시대(時代)의 문제점(問題點)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解決)하기 위해 고뇌(苦惱)하던 양심적(良心的)인 지식인이었음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