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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김정희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문화/독서

by 김도훈 2014. 7. 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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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홍준

학고재

2006.10.05

페이지 500

ISBN 9788956250533

판형 A5, 148*210mm




서장 – 저 높고 아득한 산


- “세상에는 추사(秋史)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시대의 서예가,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손꼽힘

  글씨, 시, 문장, 학문, 예술, 종교에 있어서 대가(大家)


제1장 출생과 가문 –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봉사손


명문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

-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 용궁리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시골집에서 태어남.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 어머니는 김제군수를 지낸 유준주의 딸인 기계 유씨


- 자는 원춘, 호를 추사(秋史)라 하였으나 이후 완당, 승설도인, 노과, 병거사, 노완 등 100여 개의 호를 그때그때 바꿔 씀


- 김정희(金正喜)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내로라하는 뼈대 있는 가문


예산의 추사(秋史)고택

- 추사(秋史)의 증조부는 월성위 김한신으로 영조의 사랑을 받지만 39세의 한창 나이에 요절, 남편을 잃은 화순옹주는 이내 세상을 떠남. 월성위 타계 후 집안을 조카 김이주가 이어가게 되고 아들을 넷 낳아 집안을 일으킴. 장남 김노영은 추사(秋史)의 양아버지, 막내 김노경(金魯敬)은 추사(秋史)의 친아버지


추사(秋史)의 출생설화

- 추사(秋史)의 출생에 대해서는 신기한 얘기가 여럿 전해짐. 추사(秋史)의 외가는 노론(老論)계 명문


-  추사(秋史)의 인상은 희원 이한철이 그린 조복관대의 전신상에서 알아볼 수 있다. 준수한 얼굴에 봉의 눈, 넓은 미간과 후덕한 귓밥


- 추사(秋史)는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며 자기 주장이 강한 인물


입춘첩 신화

- 추사(秋史)는 신동답게 어려서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 글을 깨우침. 북학파의 대가 초정 박제가(朴齊家)가 추사(秋史)의 재능을 알아봄


- 추사(秋史)는 여덟 살 무렵 백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음. 큰아버지인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생부 김노경(金魯敬)에게는 또 다른 두 아들이 있어, 추사(秋史)는 이들을 중제, 계제라고 부르며 친형제로 일생을 같이 살아감


- 바로 아래 아우인 산천 김명희는 세 살 아래, 막내아우 금미 김상희는 아홉 살 차이. 두 아우 모두 추사(秋史)와 글씨를 빼박은 듯이 씀. 삼형제의 우의는 남달리 돈독


- 여덥살 때 편지에 의하면 여동생도 있었던 모양이나 일찍 여의었는지 족보에는 나와있지 않음


- 열두 살 때, 1797년 7월 4일 양아버지 김노영 별세, 뒤이어 할아버지 김이주 타계. 이로 인해 추사(秋史)는 어려서부터 애늙은이 같은 진중함. 양아버지 타계로 추사(秋史)는 다시 생부 김노경(金魯敬)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아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서거이후에도 할머니와 사촌형의 타계로 집안이 초상


- 열다섯 살, 1800년, 추사(秋史)는 이희민의 딸 한산 이씨를 아내로 맞이


- 스승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문인으로 성장하는 교육을 받음


스승 박제가(朴齊家)

- 15세 무렵부터 추사(秋史)가 박제가(朴齊家)한테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박제가(朴齊家)는 연경(燕京)에 이미 세 차례나 다녀옴. 추사(秋史)는 스승으로부터 들어온 연경(燕京)을 동경해 마지 않았음


- 박제가(朴齊家)는 젊은 제자를 기특히 여겨 1801년 유득공과 연경(燕京)에 갔을 때 그곳의 젊은 학자인 조강에게 자랑. 7년후 추사(秋史)가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을 때 조강과 첫 인연을 맺게 됨


어머니와 스승의 타계

- 1801년 추사(秋史)가 16세 일 때 친어머니 기계 유씨가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 그 해 스승 박제가(朴齊家)가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805년 추사(秋史)가 20세 일 때 부친이 과거에 급제하여 순조는 월성위묘에 치제(致祭). 그 해 추사(秋史)의 부인 한산 이씨가 20세의 나이로 타계. 그 해 박제가(朴齊家)가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이내 타계. 다음 해 추사(秋史)가 21세 일 때 양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 서거


생원에 합격하고 부친따라 연경(燕京)으로

- 1808년 추사(秋史) 23세 때 ‘둘째부인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결혼. 이 후 추사(秋史) 집안에는 어지러운 재앙이 집안에 일어나지 않음


- 1809년 추사(秋史) 24세 때 11월 9일 추사(秋史)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생원(生員)이 됨. 이 때 호조참판으로 승진해 있던 생부 김노경(金魯敬)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선임되어 연경(燕京)에 가게 됨


- 추사(秋史)는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으로 감



제2장 영광의 북경 60일 – 옹방강 완원 두 경사와의 만남


조선 북학파에 대한 후지츠카의 연구

-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치카시가 추사(秋史)가 연경(燕京)에서 벌인 활약상을 치밀한 고증으로 밝혀냄. 1926년 중국철학 교수로 임명되어 경성제국대학에 재직


-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金正喜)다”


북학파 이전의 한 중 문화교류

- 조선시대 성리학은 주로 송나라 주자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발전


- 조선 후기의 실학은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사상으로 중국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문


- 이런 사상적 기류는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체계화


- 박제가(朴齊家)는 실학을 더욱 논리화, 심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관심과 자극을 받고 이를 스스로 ‘북학(北學)’이라고 함


- 이상보다는 현실, 관념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 하는 학문적 자세


-  북학파의 선봉에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그 뒤 초정 박제가(朴齊家)를 비롯한 사검서, 이 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북학의 길을 연 담헌 홍대용

- 담헌 홍대용의 연행 때 한중(韓中)교류를 활짝 염. 홍대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와 과학자, 혼천의를 만듬


- 1765년, 홍대용 35세 때 숙부 홍억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가게 되어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燕京)을 가게 됨


- 북경에서 엄성, 반정균과 안경을 선물 받고 만나게 되어 교류. 엄성이 뜻하지 않게 학질에 걸려 숨을 거둠. 엄성의 형 엄과가 임종 장면을 적어 서울의 홍대용에게 보냄


- 홍대용과 엄성의 우정 이야기는 한중 교류시 두고두고 회자됨


4검서의 연경(燕京)행

- 고국에 돌아온 홍대용은 연경(燕京)에서의 일을 을병연행록, 회우록에 기록


- 회우록은 신진학자들에게 대단한 감동과 충격


- 1778년 이덕무와 박제가(朴齊家)가 연행, 1780년 연암 박지원이 연행, 1790년 유득공과 박제가(朴齊家)가 연행


- 1801년 박제가(朴齊家) 3차 연행. 이때 박제가(朴齊家)는 중국학자들에게 추사(秋史)를 소개


- 청나라 학예(學藝)인들과 북학파 학자들은 왕성한 교류를 하였고 학자들은 극진한 대접과 존경을 받음


- 1809년 10월 추사(秋史), 24세 아버지 유당 김노경(金魯敬) 44세 때 중국행


산해관을 넘으며

- 연경(燕京)에 체류한 기간이 두 달 남짓 되는 4개월간의 여정. 서울에서 의주까지 1000리, 의주에서 연경(燕京)까지 2000리의 코스


- 요동의 산해관을 넘으며 강활한 산과 바다를 본 감회를 각산사로 돌아온 뒤 절간 벽에 시로 남김


연경(燕京) 학자와의 첫 만남, 조강

-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제일 처음 조강을 만남


- 조강은 상해사람으로 집안이 대단한 명문


- 추사(秋史)는 조강을 통하여 서송을 만나고, 서승을 통하여 북경의 여러 학예인을 만나고,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을 만나게 됨. 옹방강으로부터 보담재라는 당호(幢號)를 얻었고 완원으로부터 완당이라는 아호를 얻음


완원과의 만남

- 완원과 우연으로 만남


- 완원은 추사(秋史)에게 용단승설이라는 명차를 달여서 접대. 이후 추사(秋史)는 이를 추억하며 훗날 승설도인이라는 호를 사용


- 완원은 논어를 논한 책 『자각원본』, 『13경 주소 교감기』 등을 추사(秋史)에게 선물


- 추사(秋史)에게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함


옹방강과의 만남

-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金石學)자이자 서예가,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燕京)학계의 원로, 당대 최고의 감식가


- 고서화, 탁본, 전적 수집에 열성을 다함


- 1810년 정월 29일, 추사(秋史)는 석묵서루의 옹방강을 찾아감. 옹방강 당시 78세


- 옹방강은 소동파를 좋아하여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 라는 뜻으로 보소재라 함. 추사(秋史)는 이를 본받아 자신의 서재를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받느는 서재’라는 뜻으로 보담재 라고 함


- 옹방강은 한대(漢代) 경학에 치중하지 않고 한송불분론이라는 입장에서 송대 경학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 추사(秋史)를 비롯한 조선 유학자들은 송대 철학에 익숙하여 옹방강과 김정희(金正喜)가 서로 어울림


- 옹방강은 두 아들 옹수배와 옹수곤을 불러 추사(秋史)와 인사시키고 석묵서루를 두루 보여주게 함  

옹방강의 석묵서루

- 추사(秋史)는 석묵서루의 수장품 8만 점을 보고, 옹방강은 추사(秋史)에게 많은 책과 글씨, 탁본을 선물로 줌. 추사(秋史)가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하게 된 계기


주학년의 <전별도>

- 추사(秋史)는 연경(燕京)에서 옹방강, 완원 같은 스승 이외에 이정원, 서송, 조강, 주학년 등 많은 친구와 선배를 사귐


- 주학년은 추사(秋史)의 송별연 장면을 <추사전별도(秋史餞別圖)>로 남김


추사(秋史)의 이별시

- 전별연에서 쓰여진 전별시는 책으로 엮여 추사(秋史)에게 기증


- 추사(秋史)는 이별시를 읊으며 연경(燕京)에서 마난 학자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모두에게 시로써 감사


- 1810년 3월 어느날 귀국


제3장 학예의 연찬 – 진흥왕 순수비와 무장사비를 찾아서


추사(秋史)에서 완당으로

- 추사(秋史)는 열정적으로 학예의 연찬에 들어감. 귀국 후에도 연경(燕京) 학계와 학예를 교류. 추사(秋史)는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자기화, 토착화


- 추사(秋史)가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학예인들이 뒤를 따르며 연경(燕京)에 갈 기회가 많은 역관 등은 추사(秋史)의 애제자가 되어 추사(秋史)와 연경(燕京)학계의 연결고리가 되어줌


-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 고증학과 금석학(金石學)에 기반을 둔 ‘완당바람’이 생김


연경(燕京) 학계와의 교류

- 귀국 후 처음 5, 6년간 옹방강, 옹수곤 부자와 교류가 이루어지나 몇 해 안되어 옹방강의 아들 옹수배와 옹수곤이 젊은 나이에 잇달아 세상을 떠남


- 이에 옹방강은 자식에게 못다한 정을 완당에게 내림. 완당은 귀국 후 편지로 옹방강에게 학문을 지도받음. 옹방강은 1818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옹수곤

- 옹방강의 막내아들 성원 옹수곤과 각별한 친교를 맺었는데, 성원과 완당은 동갑


- 옹수곤은 자신의 별호를 추사(秋史)에서 한 글자 빌려 ‘성추’ 라고 함


- 1812년 옹수곤은 완당에가 <호우산장>이라는 편액을 써서 선물하였고, 이 무렵 완당은 별호로 ‘홍두’를 씀


- 두 사람은 금석을 함께 연구하고 교환하며 더없이 친하게 지냄. 완당은 중국으로 떠나는 조선의 학자들을 옹수곤에게 여럿 소개. 옹수곤이 1815년 30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남


- 옹방강은 옹수곤의 어린 아들 인달이라는 손자에게 하여금 완당을 의부로 삼게 함


- 인달은 옹방강 사후 방대한 석묵서루의 수장품을 도박과 마약으로 다 날려버림


섭지선과의 교류

- 섭지선은 귀국 후 서신을 통하여 친교를 맺음

- 옹방강의 문하에서 금석학(金石學)의 제일인자로 손꼽힘


- 옹수곤과도 굳은 우정으로 친교를 맺음


- 옹수곤이 죽은 후 옹방강은 편지로 완당에게 섭지선을 소개


- 섭지선은 조선의 금석문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완당에게 끊임없이 조선 고비 탁본을 보내달라고 요청


- 집안이 부유하여 돈에 구애받지 않고 열정적으로 조선의 책과 고비 탁본을 수집하고 연구


연경(燕京)으로 가는 학자들 : 조용진 신위 조인영 권돈인

-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는 완당 주위 문인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 나감


- 1811년 동지정사 조윤대의의 자제군관으로 운경 조윤진이 연경(燕京)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완당은 옹방강을 찾아뵙도록 소개의 글을 써줌


- 1812년 자하 신위가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을 때 완당을 통해 옹방강을 만남


- 1815년 운석 조인영이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연정 유희해와 금석지교를 맺고 돌아옴


- 1819년 권돈인이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학예인들과 교류하고 돌아옴


- 1822년 완당의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동지정사가 되어 김명희를 데리고 가서, 김명희는 오승량과 깊은 친교를 맺고 돌아옴


진흥왕 순수비 고증

- 완당은 귀국 후 우리나라의 옛 비문을 조사하기 시작


- 완당은 1816년 7월 31세 때, 동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라 비바람에 마모된 비문을 탁본하여 살펴본 결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확인


- 1817년 8월 조인영과 함께 북학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가 조사하여 마모된 글자 중 68자를 독해


무장사비 파편을 찾아서

- 1817년 4월 29일 32세 때 명비를 찾아 경주로 감


- 무장사비에 주목하여 이를 조사하고 발견


- 무장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완당은 경주 서악산 기슭을 답사하며 기초적인 고고학적 지표조사를 함


실사구시설

- 완당이 서예고증학과 역사고증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학 자체에도 고증학적 입장을 취함


- 설사구시설이란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나오는 말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


완당의 벗들

- 완당의 교우관계는 누구보다 폭넓고 긴밀하고 다양하였다


- 하나는 정통 사대부 문인, 둘째는 중인 출신의 문인 제자들, 셋째는 스님


- 이재 권돈인, 운석 조인영, 황산 김유근, 동리 김경연, 자하 신위, 침계 윤정현 은 평생 교류한 사대부 벗.


초의스님과의 인연

- 초의는 좋은 차를 완당에게 보내주고, 완당은 이에 답하는 글씨를 써서 보내주곤 함


완당의 금강산 유람과 동고문존

- 완당은 답사와 여행을 좋아함. 20대에 단양 일대를 유람하고, 30세 전후에 금강산을 다녀옴


송석원의 바위 글씨

- 서예가로서 완당이 글씨를 주문받아 남긴 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남한산성의 <이위정기(以威亭記)>


- 30대 장년시절 최고의 명작이라고 할 글씨는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암각 글씨


- 당대 최고 가는 중인 출신 시인 천수경의 아호이자 집 이름으로 이 송석원에서 모임이 열림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

- 1818년 33세 때 완당은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남김


- 김노경(金魯敬)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모두 아들인 완당이 한 것


- 완당의 장년과 중년 글은 화려하고 장쾌하며 대단히 자신만만하고 현학적


오석산 화암사의 시경루

- 완당의 예산 집 뒷산 오석산에 증조부 김한신이 1725년 경주 김씨의 원당 사찰로 지은 화암사라는 작은 절이 있음


- 완당은 화암사 대웅전 뒤로 있는 긴 병풍바위에 옹방강으로부터 선물받은, 육방옹의 글씨 <시경(詩境)>을 새기고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각자도 새김


다산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

- 완당은 다산 정약용과 같은 당대의 석학에게도 배움을 구하며 자신의 학문 세계를 넓혀감


- 완당은 다산 앞에서도 자신의 지식과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음


완당의 장년 글씨

- 완당이 연경(燕京)에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하게 되는 34세ᄀᆞ지를 그의 장년이라고 부를 때, 추사(秋史)체(秋史體)의 시작은 바로 이 장년부터라고 할 수 있음


- 40대 중년 글씨나 말년 글씨와는 다른, 매우 매끄럽고 윤기나는 글씨


- 완당은 장년시절에 그림도 그렸으며 전아한 화풍을 보임


제4장 출세와 가화 – 수선화를 노래하며

완당 부자의 출세

- 1819년 4월 25일, 34세의 완당은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


- 과거 급제 이후 38세에 규장각 대교로 출발해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내려가게 됨. 42세 때 의정부 검상을 거쳐 예조참의에 임명되고 44세 때 규장각의 검교대교 겸 시강원 보덕에 재직


-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호조참판으로 동지부사 자격을 거쳐 예조판서, 성균관 대사성, 6조의 판서, 양관의 제학, 양도의 감사 등 요직 중의 요직만 20년간 지내는 특권을 누림


서자를 위한 동몽선습

- 완당의 소실은 1817년 7월 12일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서자인 김상우


- 딸도 둘을 낳아 이민하, 조경희에게 시집 갔다고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


- 1820년 완당 나이 35세 때 완당이 서자 상우를 위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을 필사하여 한권의 책으로 제본


부친 김노경(金魯敬)과 동생 명희의 연행

- 1822년 완당 37세 때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완당의 동생 명희가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燕京) 동행


- 부친의 2차 입연을 계기로 완당과 청나라 학예인들과의 교류가 더욱 긴밀해지고 깊어짐


- 오숭량은 국자박사를 지낸 당대의 시인이며 옹방강의 제자로 묵연을 맺고 교류


고순과 반증수를 위한 글

- 1820년 완당 35세 때 청나라 고순에게 글씨대련을 보냄. 고순은 오현 사람으로 자는 희한, 호는 남아이며 과거에 급제한 후 통정사 부사에 이름


- 고순에게 보낸 <직성유궐화> 대련은 완당의 30대 후반 글씨의 한 기준작. 글씨에 살이 지고 윤기가 흐름


등전밀과 정조경의 <문복도(문腹圖)>

- 부친의 입연을 통하여 완당은 등전밀과 뜻깊은 교류를 맺게 됨


- 중국 학예인들이 완당을 존경하며 그의 글을 구하고 서신을 통해 친교를 원하는 일이 계속 됨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의 환갑잔치와 평양 기생 죽향이

- 1826년 완당이 41세 때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회갑을 맞음. 부친은 판의금부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완당은 충청도 암행어사로 재직


- 1828년 7월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게 되었을 때, 평양 기생 죽향을 만남


- 죽향은 당대의 명기로 호를 낭간이라 하였으며 시를 잘 짓고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림


눌인 조광진

- 평양에서 서예가 눌인 조광진을 만남. 평양사람으로 부벽루 연광전의 현판(懸板)을 쓴 당대의 명필


- 눌인은 출신이 한미하며 집안이 가난하여 떠돌이 생활로 글씨를 배웠으며 완당을 만나고 독창적인 서풍을 갖게 됨


다산에게 수선화를 보내며

- 수산화를 얻게 된 완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선물. 


가화:김우명과 윤상도의 상소

- 1830년 8월 27일, 부사과 김우명이 김노경(金魯敬)을 탄핵하고 나섬. 당시 정국은 어지러웠으며 정쟁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음


김노경(金魯敬)의 유배

- 김우명의 상소로 시작된 정쟁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탄핵에 김노경(金魯敬)은 1830년 10월 8일 강진현 고금도에 위리안치 


- 부친이 억울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기는 마음으로 1832년 2월 2일과 9월 10일 격쟁(擊錚)으로 호소


연경(燕京) 학계와의 끊임없는 교류

- 연경(燕京)으로 수행가는 동지사와, 사은사, 진하사 등 외교사절단과 서장관, 역관들을 통해 완당은 연경(燕京) 학계와 계속 교류


- 가장 큰 채널은 섭지선으로 옹방강의 총애를 받던 제자였기에 옹방강 생전, 생후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음


황청경해의 입수 경로

- 완당은 완원의 아들 완상생에게 『황청경해(皇淸經解)』 한 질을 구해달라고 편지를 썼으며 1832년 봄쯤 완당의 손에 들어옴. 광동에서 서울까지 1만 리 길을 2년 걸려 180여 종 1400권 350책을 손에 얻음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 유희해는 산동성 명문 출신으로 석암 유용의 손자. 조선의 금석 탁본을 모으고 모르는 글자는 편지로 묻고 기록하며 조선 금석문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수집. 이를 모아 책으로 편찬하여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전 8권을 편찬


황초령비 재발견 시말기

- 1832년 완당 47세 권돈인이 함경도 관찰사로 떠나게 되어 황초령비를 찾아봐달라고 부탁. 이를 탁본하고 연구


부친 김노경(金魯敬)과 다산 정약용의 서거

- 1833년 9월 22일 김노경(金魯敬)이 귀양살이에 풀려났으나 1837년 3월 30일 김노경(金魯敬)이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1년 여 전 1836년 2월 20일에는 다산 정약용이 세상을 떠남


제5장 완당바람 – 해외묵연 원교필결후

왕희순의 「해외묵연(海外墨緣)」

- 완당 나이 50세 때 이미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당대의 대가 위치에 오름


- 왕희순은 자가 맹자이고 원래 이름은 희손이나 개명하여 희순이라고 함. 당대 석학이던 왕중의 아들로 완당과는 동갑내기로 만난적은 없으나 서신으로 친교를 맺음


- 1838년 완당과의 편지를 책으로 묶어 「해외묵연(海外墨緣)」 편찬


완당의 청나라 학예계 비판

- 완당은 고전적인 학설과 청나라 당대 학자들의 견해를 두루 언급하고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당당하게 말함


완원의 ‘북비남첩론’

- 완당은 학술 뿐만 아니라 서화에서도 확고한 자기 이론을 가지고 있었음. 북파를 지지하여 고졸하고 준경한 멋을 추구


옹방강과 유용의 입고출신

- 청나라 사람들은 옛것을 본받으며 새것을 창출하는 입고출신(入古出新)에 입각


- 완당은 청나라 서예계의 사정을 훤희 꿰뚫고 이들의 서체와 서론을 본받음


완당의 제자들과 우선 이상적

-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우봉 조희룡, 황산 김유근, 초의스님 등 완당과 일파를 이룬 서화가들과 양반 출신의 문인, 역관들과 완당바람을 일으킴



완당 일파의 화가와 우봉 조희룡

- 서화가 또한 완당의 제자로 도화선 화원도 있으며 한약사로 서화에 능한 중인묵객도 있으나 이들은 19세기 중엽 완당 일파의 문인화풍을 펼쳐나간 주역


- 그 중 첫째가는 제자는 우봉 조희룡으로 시, 서, 화 모두에 능한 명사이지만 완당은 조희룡에게 비평


소치 허련

- 완당이 가장 아낀 제자는 소치 허련으로 진도 출신이며 초의의 소개로 완당에게 배우게 됨


완당의 산수화와 난초 그림

- 완당도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알려짐. 완당은 화법이나 묘사력은 떨어지나 그 격조는 일품이라 평


- 그 중 난초에 대해 당당한 화론까치 펼치는데 아들 상우에게 가르치길 첫째는 삼전법(三傳法), 둘째는 인품과 교양이라고 함


완당의 운교 필결 비판

- 완당은 자신의 서예론을 주장하며 「원교필결후(員嶠筆訣後)」에서 원교의 『필결(筆訣)』을 비판


- 이광사는 자를 도보, 호를 원교라 했고 본관은 전주로 집안 대대로 글씨의 명가


- 완당은 원교 사후 10년에 태어난 인물이지만 역사적 비평이 아닌 동시대적 비평을 가함


다시 일어나는 윤사오 옥사와 완당의 유배

- 1840년 완당 55세 때 동지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안동 김씨들이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공격


- 우의정 조인영은 완당을 위해 상소「국문받는 죄수 김정희(金正喜)를 참작하여 조처해 줄 것을 청하는 글」를 올리고 이에 완당은 목숨을 구해 제주도로 귀양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 세한도(歲寒圖)를 그리며

위리안치라는 형벌

-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형(流刑)이라는 형벌 중 천사(遷徙), 부처(付處), 안치(安置) 등 세가지가 있었음


- 위리안치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중형. 완당은 그 중 제주도 서남쪽 80리 아래 정현에 위리안치됨


유배지로 가는 길

- 1840년 9월 2일 대정현에 위리안치되도록 명받음. 완당이 유배길에 남긴 자취는 드무나 남원을 지날 때 권돈인에게 <모질도(耄耋圖)>를 그려 보냄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보고

- 완당이 유배가는길 전주를 지날 때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나 글씨를 평받음. 창암은 시골의 서생으로 원교 필첩을 보고 글씨를 쓰는 지방 작가였으며 글씨는 촌스러웠고 향색은 짙었음. 이를 완당은 비평. 

 

대둔사에서 초의를 만나고서

- 전주를 떠난 완당이 유배길에 일지암에서 초의선사를 만남. 초의를 만난 완당은 앞길에 대해 하소연 하다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懸板)을 내리게 하고 <대웅보전> 과 <무량수각> 이라는 현판(懸板)을 써 줌  

제주도로 가는 배

- 제주로 향한 뱃길은 아슬아슬하였으나 마음에 여유로움을 가지고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 후에 전설로 남겨지기도 함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 도착한 항구는 화북진으로 화북에서 대정까지 80리를 걸어 귀양길을 재촉. 1840년 10월 2일 대정현 도착. 대정읍성 안동내 송계순의 집을 유배처로 삼음. 이후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고 유배가 끝날 무렵 안덕계곡이 있는 대정현 창천리로 한 번 더 옮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귀양살이는 괴롭고 어려웠으며 이를 오직 편지로 달램


아내가 보내준 음식과 옷

-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이라면 육체적으로는 음식과 질병. 아내에게서 음식과 옷 등을 조달받음


양봉신과 오진사라는 구인

- 강경에서 드나드는 뱃사람 양봉신이 구인(救人)의 역할을 함. 양봉신은 완당의 귀양살이를 보필해줌. 오진사라는 사람 또한 적막강산에서 지적교환을 나눠 정신적으로 도움 

끊임없는 질병 호소

- 귀양살이동안 완당의 몸은 편치 않음. 잦은 질병에 고생


소치의 첫 번째 방문과 양아들 상무

- 1841년 2월 소치 허련이 대정의 유배처로 찾아옴. 완당은 매일 소치에게 그림과 글씨를 가르쳤으나 소치에게 중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날아와 대정에 온 지 4개월만에 떠남


- 완당은 김일주의 증손자이자 완당과 13촌인 상무를 양자로 들이고 아우 명희에게 가정교육을 도맡음

아내의 죽음

- 1842년 11월 13일 아내 예안 이씨가 지병으로 사망

초의스님의 방문

- 1843년 봄, 초의스님이 완당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하여 반년을 한 지붕에서 지냄.

제주목사 이용현과 소치의 두 번째 바운

- 1843년 6월 새 제주목사로 이용현이 부임. 제주목사의 막하로 들어온 허소치가 완당의 수발을 들어주며 배움

왕성한 독서열과 법첩 연구

- 귀양살이동안 완당은 학예에 열중, 심화

백파스님과의 논쟁

- 백파스님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8세에 출가. 백파와 초의선사의 논쟁에 김정희(金正喜)가 끼어들어 서로 논리를 반박하며 논쟁.

- 「백파 망증 15조(白波妄證 十五條)」는 조선시대 선학의 연구의 과제가 되어 논란이 됨

위당 신관호

- 해남에서 완당의 제자 위당 신헌이 전라 우수사로 부임. 완당과 위당은 서로 서신을 주고 받다 완당은 소치를 위당에게 소개

- 완당은 위당에게 초의스님을 만나보라고 권유. 완당은 제주도에 앉아서도 ‘완당 일파’를 연결시키며 세를 얻음 

<세한도(歲寒圖)> 제작 과정

- 1844년 완당 59세 때 그의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변함없는 사제간의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줌

<세한도(歲寒圖)>

- 완당 최고의 명작 <세한도(歲寒圖)>는 구도와 묘사력 뿐만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으로 보아야 함. 그림과 글씨와 문장이 높은 격조를 드러내고 있음

<세한도(歲寒圖)>의 제와 찬

- 이상적은 1845년 오찬 장원의 잔치에 초대받고 <세한도(歲寒圖)>를 내보여 좌객들 모두 격찬하며 시와 문으로 붙임. 이것이 <청유 십육가(淸儒 十六家)의 제찬(題讚)>

<세한도(歲寒圖)> 그 이후

- 시화축을 이상적은 귀국 후 완당에게 자랑삼아 보여줌. 

- 권돈인은 <세한도(歲寒圖)>를 본받아 <세한도(歲寒圖)> 한 폭을 그림. 완당은 갈필을 구사하였지만 권돈인은 윤필을 강조하여 더 온후한 느낌.

- 소전의 열정에 소유주 후지츠카가 소전에게 건네줌


제7장 제주도 유배시절 (하) - 수선화를 노래하며

이양선의 출현

- 1845년 5월 22일 제주도에 이양선,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가 뱃길을 위한 해심 측량을 위해 제주도 정의현 지만포 우도에 정박

영국 군함 사마랑호의 해심 측정

- 완당 또한 서국 제국주의의 본질을 모르고 결국 완당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에 병인양요를 일으키게 됨

- 완당은 사마랑호가 만든 항해지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음.

완당의 회갑과 집안의 애 경사

- 1846년 완당이 회갑을 맞는 해 양아들 상무가 양어머니 상을 당한 데 이어 친어머니 상까지 치르며 사촌형 교희와 사촌누님이 세상을 떠남. 맏며느리는 아들을 낳음.

예산 <화암사 상량문((上樑文)>

- 1846년 예산에서 경주 김씨 원당사찰인 화암사의 중건이 이뤄지고 완당에게 상량문과 현판(懸板)을 맡김. 글씨가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명상적.

창덕궁 낙선재의 완당 현판(懸板)들

- 완당은 헌종이 평소 거처하던 낙선재에 글씨요구로 글씨를 쓰고, 다른 글씨요구에도 독촉을 받음 

헌종대왕의 완당 글씨 요구

- 완당은 임금의 명을 받고 <목련리각> <홍두> 등을 써 보냄

완당의 지필묵

- 완당은 붓의 종류와 성질을 잘 알고, 글씨의 성격에 다라 붓을 골라 쓰는 섬세함을 가짐. 그 중 쥐털로 만난 서수필을 제일 선호

- 먹과 벼루에 대해서 또한 섬세한 감각을 가짐

완당의 종이

- 종이의 선택에도 아름다운 종이, 붓에 잘 맞는 종이, 먹을 잘 받는 종이 등 매우 섬세하게 신경씀. 

필장 박혜백과 전각가오규일

- 붓 만드는 필장 박혜백이라는 제자를 얻고 가르침. 


- 완당은 소장 오규일에게 전각을 지도하며 오규일은 완당의 도장을 새김

서한 시대 예서의 임모

- 완당은 형태미가 많이 드러나는 후한 시대의 예서보다 순박하고 고졸함이 살아있는 전한 시대의 예서를 더 선호

- 서한 시대 예서를 임모한 서첩을 가지고 추사(秋史)체(秋史體)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

제주시절의 완당 글씨

- 완당이 초의스님의 일지암에 써준 <일로향실(一爐香室)> 현판(懸板)은 추사(秋史)체(秋史體)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보여줌

박규수의 추사(秋史)체(秋史體) 성립론

- 완당이 어렸을 때에는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으며 만년에는 제주도에서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룸

청명 선생의 추사(秋史)체(秋史體) 성립론

- 완당은 옹방강의 서법을 그대로 따르기에 힘썼으나 당에서 남북조, 위진에서 한예에 이르기 까지 나아가 자기의 필법으로 씀

이동주 선생의 추사(秋史)체(秋史體) 제주도 성립론

-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글씨를 썼다는 점에서 괴이한 개성이 나온 계기가 됐을 것

완당의 제주 시

- 완당의 시세계는 제주도 이후에 달라졌음. 시간이 지날수록 완당은 제주의 귀양살이에 익숙해져 점차 제주의 풍토와 자연을 관조하며 그것을 노래하는 경지에 오름

제주읍내 오현단을 다녀와서

- 제주목사의 아량으로 제주읍까지 여행하며 답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음. 이때 삼별초의 유적지나 한라산 등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당호(幢號)를 귤중옥이라 지음

수선화를 노래하며

- 제주도에 수선화가 지천으로 널려있었으며 제주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것을 아쉬워 함

아들 상우에게 그려준 <시우란(示佑蘭)>

- <시우란(示佑蘭)>을 통해 아들 상우에게 그려준 난초는 필법이 정법에 가까움

제주의 문맹과 교화

- 제주도의 유배객으로써 완당은 제주의 인문을 보고 한심함을 넘어 놀람. 제자를 가르침

강위의 방문과 제주목사 장인식

- 1846년 고환당 강위가 완당에게 배우러 찾아옴


- 1848년 장인식이 제주 목사 겸 방어사로 부임하여 완당과 긴밀하게 교류

소치의 세 번째 방문

- 1847년 소치가 제주도로 세 번째 방문. 소치의 그림실력은 나날이 발전하며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등 다양한 그림을 그림

허소치의 헌종대왕 배알

- 1849년 정월 창덕궁 낙선재에서 헌종대왕을 배알하게 됨. 소치는 임금에게 완당의 생활을 알려줌 

방송(放送)

- 1848년 12월 6일에 9년, 만 8년 3개월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남. 제주병사 장인식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며 육지로 향함

일로향각의 초의스님

- 완도에 도착하여 초의 스님을 만남. 일로향실에서 원교의 현판(懸板)을 걸어두게 되었다는 설(說)

구암사의 백파스님

- 완당은 정읍을 향하여 떠나 백파스님을 만나러 갔지만,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함. 이에 완당은 구암사 쪽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고 완주(전주)를 향했다고 함

창암 이삼만의 묘비를 찾아

-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을 찾아 모질게 비판한 것을 사죄하고 싶었지만 이미 1847년 창암은 세상을 떠났고, 이 때 완당은 창암의 묘비명을 씀


제8장 강상시절 – 노호의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에서

완당 생애의 시대 구분

- 완당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뉘며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 북청 유배 기간동안 수많은 명작을 남김

강상에서

-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완당은 삼호의 강상에서 머물게 됨. 오늘날의 용산의 강마을

완당 별호의 유래

- 완당은 항상 그때의 심정, 상황에 따라 새로 아호를 짓고 그것을 관지로 나타냄. 약 200개가 넘음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의 유래

-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이란 ‘많은 수의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으로 홍한주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확인할 수 있음

집안의 궁핍과 강상의 서정

- 노호 강상에서 완당의 삶은 어려웠음. 그러나 예술과 더불어 여유있는 삶을 삼

예림갑을록:묵진 8인

- 완당이 귀향에서 돌아온 후 제자들이 모여들어 1851년 여름, 완당 나이 66세 대 사흘씩 세 차례 지도와 품평을 열며 가르침. 이에 『예림갑을록(藝林甲乙綠)』 탄생

예림갑을록:화루 8인

- 화루 8인은 매번 화제를 정하여 반절 크기의 축으로 그림을 그림. 완당은 실작품을 지도

권돈인의 옥적산방

- 완당은 다시 서서히 벗들과 교류하며, 그중 권돈인의 옥피리를 계기로 별서(別墅)를 옥적산방이라 부르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림

석파 이하응의 난초 학습

- 강상시절 완당은 석파 이하응의 선물과 편지를 받음. 석파는 완당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 찾아옴

강상에 온 초의스님

- 완당의 간청에 초의가 강상을 와 2년 동안 벗해주며 같이 지냄.

은해사의 추사(秋史) 현판(懸板)

- 혼허 지조 스님의 부탁으로 경북 영천 은해사에 여러 현판(懸板) 글씨를 써주게 됨

서지환의 글씨 요구

- 유배시절보다 창작 여건이 좋았던 강상시절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서지환이라는 사람은 완당에게 당당히 글씨를 요구하여 완당은 이를 받아들여 글씨를 써줌

강상시절의 글씨:<단연(端硯)․죽로(竹爐)․시옥(詩屋)> <소창다명>

- <단연 죽로 시옥>이나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작품은 완당의 강상시절 글자의 파격의 미를 볼 수 있음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 강상시절 대표작인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는 완당 서예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며 구성미가 두드러진 서풍

추사(秋史)체(秋史體)의 특질:괴

- 완당의 추사(秋史)체(秋史體)는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추사(秋史)체(秋史體)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며 내면의 울림이 존재

완당의 장인적 수련과 연찬

- 완당은 글씨를 쓸 때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보이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란 충고

<불이선란(不二禪蘭)>

- 강상시절동안 그 동안 뜸했던 난초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림. <불이선란(不二禪蘭)>은 난화가 극단적인 파격으로 드러난 작품으로, 완당은 자신이 추구한 난초 그림의 이상을 구현하여 만족


다시 일어나는 정쟁

- 1849년 헌종이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안동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어 진종 위패를 둘러싼 당쟁이 펼쳐졌으며, 안김의 완승으로 끝남.


제9장 북청 유배시절 – 변방의 찬 하늘 아래서

함관령을 넘으며

- 1851년 7월 22일 완당 북청 유배를 명받음. 함흥에서 북청을 가며 홍원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고갯마루가 함관령으로, 완당은 이를 넘어가며 시 한 수를 읊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임

자작나무 굴피집에 살며

- 귀양살이집을 ‘북청 성동의 화피옥’이라 부르며 힘들고 고되게 지냄

동암 심희순에게 보낸 편지

- 북청 유배시절동안 강상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동암 심희순과 교류하며 외로움을 하소연

함경감사 윤정현

- 침계 윤정현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당이 윤정현에게 <침계(梣溪)> 글씨를 써줌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 완당은 윤정현에게 황초령비를 찾아보게 하고 보존하도록 함. 윤정현은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비각을 세움

요선 유치전

- 북청 유배시절동안 완당은 북청의 인사를 추천하며. 그중 요선 유치전을 제일로 침.

완당의 민족적 자주심과 북방의식

- 완당은 고증학자이자 역사지리학자로 민족적 자부심과 우리 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동경한 사람이며 이는 그가 읊은 영사시(詠史詩)에서 확인할 수 있음

숙신의 돌화살촉

- 북청 곳곳에서 발견된 석노, 즉 돌화살촉을 완당은 숙신의 유물이라 판정하며 <석노시>를 지어 돌화살촉을 노래

해배

- 1852년 8월 13일 해배의 명을 받고, 승정원은 반대하였으나 철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완당은 돌아오게 됨.


제10장 과천시절 –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주암리 돌무께의 참외밭 초당

- 북청에서 귀양 생활 살림살이를 거두어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머뭄


퇴촌의 권돈인

- 완당은 다시 벗들과 교류하기 시작함. 그 중 평생 동지 권돈인은 경기도 광주 퇴촌에 새 집을 마련하고 여기에서 만년을 보냄


두릉의 정학연과 정학유

- 과천시절 완당은 다산 정약용의 아들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와 친교를 계속함. 완당은 두릉의 여유당으로 찾아갔던 자취도 있음


석파 이하응의 난초 그림

- 완당과 석파의 교류는 완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완당의 가르침은 난초 뿐만 아니라 글씨에까지 미침


초의스님이 보고 싶습니다

- 완당은 과천에서도 초의스님을 그리워하며 서신을 보냈지만 초의는 완당 살아생전 과지초당으로 찾아오지 않음


완당과 스님들

- 완당은 과천시절 스님들과의 만남이 더욱 잦았으며 완당은 불심이 돈독하여 염불(念佛)신앙(信仰)을 강조하기도 하였음


- 완당은 불가의 요구를 받아 <소묘암(逍遙庵)>, <자묘암(慈妙庵)>같이 절집 암자의 현판(懸板) 글씨를 써주기도 함


이당 조면호

- 완당의 과지초당 시절, 벗들을 대신하여 제자들이 외로움을 달래주었으며, 이당 조면호는 누님의 사위로 더욱 반가워함


완당의 잡기와 취미

- 완당은 잡기로 바둑을 두거나 젊어서는 술을 잘했음. 잡기에 대해서는 대개 맛은 알지만 즐기지는 않은 스타일. 진정한 취미는 독서와 글씨쓰기


연경(燕京) 학계 소식과 이상적

- 완당은 만년까지 연경(燕京) 학계와 교류를 끊지 않았는데, 나이 70이 되어서도 학덕을 쌓으려는 의지를 보여줌


제자들을 가르치며

-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 중 동암 심희순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글씨를 지도 

소당 김석준

- 가장 사랑한 제자는 소당 김석준으로 본관은 선산, 자는 희보, 호는 연백당으로 손가락으로 쓰는 지두서를 잘 썼음


- 완당은 김석준을 누구보다 아껴 청을 다 들어주기도 함


금강안

- 완당은 스스로 미술 감상법을 말하길 ‘금강안∙혹리수’라고 함. 완당은 사실상 뛰어난 미술사가. 이는 역매 오경석에게 전수되었음.


만년의 시와 서정

- 완당의 과천 생활은 평범한 일의 연속으로 여기에서 보편적 가치를 깨달으며 자신의 인생과 예술 모두를 원숙한 경지로 마무리


완당의 열정(熱情)과 관용(寬容)

- 완당은 기질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으로 체득한 학예의 성과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며 세상을 위해 애쓰는 것으로 학자의 사명을 다하고자 함. 다만 관용의 미덕이 결여되어 매사에 시시비비를 따지고 수많은 적을 만들어 냄 


노과시절의 졸과 허

- 강상시절 완당은 ‘괴(怪)’의 가치를 말했으나 과천으로 돌아와서는 졸(拙)함을 말함


<신숭해심><유천희해><명선>

- 완당의 과천시절 글씨 중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이나 완당의 대표작으로 <산숭해심(山崇海深)><유천희해(遊天戱海)>로 전서, 행서, 예서체가 함께 어우려져 있음. 본래 한 작품이었으나 누군가가 따로 떼어냄


- <명선(茗禪)>은 초의가 보내준 차에 대한 답례로 글씨의 골격은 예서지만 획의 구사는 해서법과 행서법이 섞여 있음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秋史)체(秋史體)의 위치

- 조선시대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뽑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金正喜)를 뽑음


- 완당은 국제적 감각의 신풍을 일으킴


<백파선사비문>

- 완당이 70세가 되자 호를 과칠십(果七十)이라 하였음. 완당은 백파를 사모하는 마음, 사죄하는 마음으로 백파스님의 비문을 지음


완당 글씨의 국제적 인기

- 완당의 글씨는 생전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유명하여 얻으려는 사람이 많았음


칠십일과 병중작

- 완당이 71세가 되어 1856년 10월 10일 세상을 떠남. 아우 김명희는 1857년 10월 25일 나이 70으로 완당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남


- 완당은 죽는 그 해 그 순간까지 글씨에 대한 연구를 그치지 않음


<산호가 비취병>

- 북청시절 애제자였던 유요선에게 주기 위하여 쓴 <산호가 비취병(珊瑚架 翡翠甁)>은 노경의 스스럼없고 허화로운 경지를 보여줌


<해붕대사 화상찬>

- 완당이 세상을 뜨기 5개월 전, 해붕대사의 문도 호운(浩雲)이라는 중이 화상찬(畵像讚)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하여 직접 짓고 써줌


봉은사의 완당

- 상유현은 완당이 기거하는 봉은사 동편 모습부터 묘사하여 완당의 인상을 섬세하게 묘사


마지막 명작:<대팽두부>

- 완당이 마지막 남긴 예서체 대련 <대팽두부(大烹豆腐)>는 완당의 소박하고 욕심없고 꾸밈없는 순후함을 잘 보여줌


절필:봉은사<판전>

- 1856년 10월 봉은사에 있던 완당이 <판전(板殿)> 두 글자를 완성


종장 완당의 서거와 사후의 평가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우봉 조희룡의 만사

- 제자 우선 이상적가 우봉 조희룡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


권돈인의 화상찬과 추모시

- 권돈인은 완당 사후 뒷일을 모두 감당하고 처리


초의스님의 제문

- 초의스님은 완당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다만 제문을 바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졸기

- 제자들 뿐만 아니라 역사가들도 완당의 학예가 세상에 끼친 공을 잊지 않고 기록


맺는 글: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산숭해심(山嵩海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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