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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역사의 미술관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문화/독서

by 김도훈 2014. 7. 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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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주헌

문학동네 

2011.11.07

페이지 368

ISBN 9788954616416

판형 A5, 148*210mm




I 산은 높고 골은 깊다


알렌산드로스, 포용(包容)의 리더십으로 대제국을 건설하다


- 알렉산드로스의 리더십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맞는 다리우스의 가족>에 그 특질이 잘 나타나 있음


- 이수스 전투에서 패한 다리우스의 가족은 죽을까 두려웠으나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며 지위(地位)와 명예(名譽)를 존중해주겠다고 약속. 그러나 다리우스의 어머니 시시감비스는 왕의 자비에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절하는 게 잘못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친구 헤파이스티온에게 절

- 알렉산드로스는 실수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다독여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고 자신의 친구에게는 공개적으로 신뢰(信賴)와 애정(愛情)을 보여줘 왕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갖게 함

- 왕의 신하가 다리우스의 아름다운 왕비를 후궁(後宮)으로 취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왕족의 명예를 존중

-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紀元前) 356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남

- 그가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되어 왕위에 오름. 즉위 뒤 북방 발칸 반도의 이민족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고 그리스 내의 반란을 척결

- 기원전(紀元前) 334년 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동맹군을 이끌고 선왕(先王)의 염원이던 페르시아 원정에 나섬

-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쿠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중요한 대결전마다 승전고를 울리며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중동 지역을 정벌한 뒤 인도까지 침공

- 알렉산드로스는 피정복민들에게 정복자로 군림한 게 아닌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씀

- 17세기 프랑스 화가 샤를 르브룅의 <알렉산드로스와 포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도량과 포루스의 당당함을 알리는 유명한 일화(逸話)를 묘사하고 있음


- 알렉산드로스의 위대한 기상(氣像)과 너른 마음을 스펙터클한 파노라마 화면에 실어 형상화한 그림


- 랜스 커크는 알렉산드로스의 문제를 재구성하는 능력과 아이덴티티를 확립하는 능력, 정치적 결단(決斷)이나 중요한 사건(事件)을 상징(象徵)화하는 능력을 꼽음


- 알렉산드로스는 자신과 자신의 군대를 위한 롤모델을 부지런히 찾았고 끊임없이 이를 상징화하려고 노력


- 알렉산드로스가 호메로스에게 평생 푹 젖어들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덕(悳)


- 렘프란트는 대왕의 위대함이 실은 위대한 지성(知性)으로부터 온 것임을 독특한 구성의 그림으로 표현


한눈에 읽는 마케도니아 역사


-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고대(古代) 왕국으로 기원전(紀元前) 7세기 초에 아르게아드 왕조의 통치 아래 마케도니아 왕국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짐

-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 전쟁(기원전(紀元前) 514~479) 대 페르시아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그리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충돌이 잦았으나 후에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를 지배하는 시대를 보냄


- 기원전(紀元前)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자 내전(內戰)이 벌어지고 그 결과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맘


영웅과 신의 이미지로 표현된 알렉산드로스 


- 스스로를 고대(古代)의 영웅들과 동일시 했떤 알렉산드로스는 고대(古代) 미술에서 갖가지 영웅이나 신의 이미지로 표현


- 알렉산드로스는 미술 분야에서는 다양하게 칭송되었으나 문학에서 보내준 찬사는 그만 못미침.


아우구스투스, 역사가 낳은 최고의 통치 달인


- 고대(古代) 로마는 오늘날 유럽 문명이 성격을 결정지은 위대한 자궁으로 그 로마를 이끈 탁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기원전(紀元前) 63~ 서기(西紀) 14) 이다.


- 아우구스투스의 위업을 토대로 ‘팍스 로마나’의 번영이 꽃피어날 수 있었고, 유럽 문명이 잔뼈를 다지고 근육을 키울 수 있었음


- 아우구스투스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은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프리마 포르타의 아구스투스> 일 것 서기(西紀) 14~37년경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그의 권좌를 이은 티베리우스가 주문하여 만든 것


- 아우구스투스의 다리에 돌고래를 탄 큐피드는 부목역할을 하며 큐피드는 비너스의 아들이고 돌고래는 비너스가 바다에서 태어났음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로마의 관객은 이 둘을 통해 자연스레 비너스를 떠올리도록 함


- 고대(古代) 로마에는 수호천사처럼 개인을 지키는 영적 존재가 있었으며 이를 게니우스라 부름. 아우구스투스의 게니우스는 신적 숭배대상으로 공표되었으며 사후 아우구스투스가 신으로 선포됨


- 공화(共和)정 시대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으로 이제 로마가 제정이라는 강력한 군주제(君主制)로 들어섰음을 의미


- 아우구스투스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불림


- 아우구스투스는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로 불리는 것을 선호. 자신이 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화(共和)국을 수호하는 제 1시민이라는 것을 보임


- 당시 로마의 공화(共和)정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음


-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을 때 국가의 통치의 중요성을 대답


- 아우구스투스는 ‘평화의 왕자’로 기려지기를 바랬으며 이는 <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이>에 잘 드러나 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지향한 통치 이념과 가치를 총체저그로 다 드러내 보임


- 아우구스투스가 정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그의 곁에는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같은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친구도 함께 함


한눈에 읽는 로마의 역사


- 로마 제국은 기원전(紀元前) 8세기 무렵부터 기원전(紀元前) 510년까지 왕정기, 기원전(紀元前) 510년부터 옥타비아누스의 등장까지 공화(共和)정기,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로 분류


- 395년 로마 제국은 동 서로 분열되어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비잔틴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


로마의 미술시장


- 서양에서 오늘날과 유사한 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시대부터임


- 로마의 미술시장이 크게 발달하게 된 데는 정복을 통해 그리스 미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침


루이 14세, 절대왕정의 환영에 목을 맨 태양왕


- 루이 14세는 전쟁을 자주 벌이고 베르사유 궁전 같은 엄청난 궁궐을 짓고 온갖 화려한 향연(饗宴)을 펼침


- 이아생트 리고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영광의 정점에 선 루이 14세를 그린 그림


- 권력자를 그릴 때 유럽 화가들은 전통적으로 ‘위세 초상’의 관행을 따름


- 루이 14세는 상징조작의 대가로 이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사람들이 소비하게 함


- 루이 14세는 1638년 선왕 루이 13세와 왕비 안 도트리슈 사이에 태어남


- 루이 14세는 선왕의 이른 죽음으로 불과 다섯 살에 옥좌에 올랐지만 통치 능력이 없었던 까닭에 모후가 섭정을 했고, 실제적인 권력은 재상 마자랭이 행사


- 루이 14세가 이뤄낸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는 진정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아니었으며 실제보다 표현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더 크게 작용한 절대왕정임


- 루이 14세는 이전 왕들과 달리 모든 행정의 최종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


- 왕의 영광을 찬양하는 수다한 조형물은 대부분 프랑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회원들이 만든 것. 이 아카데미는 루이 치하인 1648년에 창설


한눈에 읽는 프랑스의 절대주의


- 루이 14세(재위 1643~1715)는 무려 72년 3개월 18일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가장 오랜 재위 기록


- 루이 14세는 1715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오랫동안 갈구해온 해방을 주신 신께 감사하며 기뻐했다고 함


루이 14세의 수석 궁정화가 샤를 르브룅


- 미술을 통해 강력한 이미지와 상징을 만들기 원했던 루이 14세는 ‘샤를 르브룅’을 수하(手下)에 둠


나폴레옹, 시대를 창조한 위대한 전략가 


- 나폴레옹(1769~1821)은 탁월한 직관력의 소유자. 나폴레옹의 초상화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일 것


- 위대한 인물은 다름 아닌 행운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폴레옹이 보기에 그런 사람은 대부분 전략적인 사고를 하고 목표를 확실하게 관철(觀徹)할 수 있는 방법을 직관(直觀)적으로 찾아내는 천재들


- 윌리엄 더건은 수많은 위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바로 주어진 내적 외적 조건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만드는 직관(直觀)력이라고 생각


-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 장 그로의 <아르콜레에서의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용맹성이나 힘이 아니라 두뇌로 승승장구한 이임을 선명히 묘사한 작품


- 나폴레옹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나폴레옹은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그들의 재능을 인정해 자부심을 극도로 높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음


한눈에 읽는 나폴레옹의 역사


- 프랑스 혁명(1789~1794)는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共和)정을 세운 시민혁명으로 왕이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파리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혁명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1795년 총재(總裁)정부가 수립(樹立)


<나폴레옹 대관식> 자세히 들여다보기

- 다비드는 대관식에 참석했던 실제 인물들을 스튜디오로 불러 그린 뒤 상세히 그렸던 모델의 포즈와 합성해 화포(畵布) 위에서 완성


이반 뇌제, 차르는 하늘보다 높고 멀다


-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가 일리야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은 러시아 역사의 비극적인 순간을 생생히 묘사


- 이반 4세의 별명은 이반 뇌제로 영어로는 ‘이안 더 테러블’, 러시아어로는 ‘이반 그로즈니’이다.


- 이반 4세는 단순히 무섭고 잔인한 군주만이 아니었고 유능하고 강력한 통치자이기도 함


- 이반이 대관식을 가진 것은 그가 열일곱 살 되던 1547년의 일로 황제를 의미하는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차르가 됨


- 친위대 오프리츠니키를 조직하면서부터 차르를 배반한 자 뿐만 아니라 차르의 기분을 거스른 자, 그런 자들과 가족이거나 친구인 자, 좋은 땅을 가지고 있는 자, 부유한 자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


- 이반 뇌제는 1584년 3월 28일에 운명하였으며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설이 많이 존재함


한눈에 읽는 러시아의 역사


- 류리크(?~879)에 의해 러시아가 건설되면서 러시아의 역사가 시작


- 류리크의 자손은 1598년까지 러시아에 군림하면서 키예프 공국과 모스크바 공국을 지배했으며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반 3세 때부터 전제 군주 체제 확립. 왕권 강화


- 1721년 러시아 정교의 교구를 신성종교의회로 대체하여 교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강화


전제군주 차르


- ‘임금님’이나 ‘나라님’ 같은 호칭과 달리 차르는 매우 잔혹(殘酷)하고 억압(抑壓)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 삼권을 장악하고 러시아 정교회 수장을 겸한 전제자로 헌법과 제도화된 내각, 선출된 입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


- 이반 뇌제뿐 아니라 많은 차르들이 억압적으로 냉혹한 면모를 보여줌


- 차르의 이미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야심찬 무기 개발에 그대로 스며들어 지금까지 폭발한 폭탄 가운데 가장 강력한 폭탄인 수소폭탄의 이름으로 ‘차르 봄바’가 사용됨


스탈린, 20세기 빅브라더의 가장 공포스러운 전형


- 자신의 혁명 동지를 비롯해 800만 명을 숙청하고 집단농장(集團農場)화 등 강압적인 농업 정책으로 1000만 명 이상 굶어죽게 만든 폭군


- 스탈린은 이차세계대전(世界大戰)을 일으킨 전범국가 독일과 싸워 이겼고, 소련의 영토를 넓혔으며, 동유럽의 여러 나라를 위성국가로 만들어 체제를 수호. 폭발적인 공업화와 근대화로 러시아 역사상 국력을 최고로 신장시켰고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우뚝 세움


-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그루지야의 시골 마을 고리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남.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이며 강철을 뜻하는 러시아어 스탈에서 나온 스탈린은 레닌이 지어주었다고 함


- 스탈린은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으로 결국 그가 난폭한 독재자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됨


-스탈린이 가장 총애한 화가는 게라시모프로 장군들 초상을 그리던 보수적인 화가. 스탈린 그림에는 배경에 레닌 조각상이 자주 등장하며 미술을 정치권력의 선전 수단으로 사용


한눈에 읽는 러시아 혁명


- 러시아 혁명은 1905월 제1차 러시아 혁명과 1917년 3월 혁명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회변혁 과정을 일컬음


- 1924년 레닌이 죽자, 스탈린은 트로츠키파를 숙청하고 실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러시아 혁명 10주년이 되던 1927년 독재체제를 완성


러시아 혁명과 아방가르드 미술


-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은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을 중시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은 복고적(復古的)인 느낌이 강하고, 아방가르드 미술은 진취적(進取的)인 느낌이 강함


- 아방가르드 미술은 당시의 교육, 문화 수준에 비춰 러시아 민중의 눈에 매우 난해하게 비쳐짐


II History 속의 Herstory


클레오파트라, 사랑의 전략으로 일어선 권력의 화신


- 클레오파트라는 살아 있을 때부터 신화를 양신하며 왕국의 권력과 종교를 체화한 살아있는 여신이었음


-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파라오로 라지드 왕조는 마케도니아 정복자의 피를 이은 왕가임 


- 클레오파트라는 선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공동통치자로 등극.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나이는 열 살


-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에서 패함으로써 그녀의 자식들 가운데 카이사르의 피를 이은 카이사리온은 죽임을 당하고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나머지 자식들은 안토니우스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보내지며 그녀는 마지막 파라오가 됨


한눈에 읽는 이집트의 역사 


- 이집트 역사는 크게 고대(古代)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王朝) 시대, 로마 지배 시대, 그 이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으며, 고대(古代)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


- 지도층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집트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토착종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됨.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발발하자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넘어가다 1952년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장교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자리에 앉아 현대 이집트가 수립(樹立)


퐁파두르 부인, 파리의 스타일을 지배하다


-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의 정부로 아름답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국정(國定)에도 큰 영향 


- 퐁파두르 부인은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을 나이보다 젊게 그리도록 하는 등 예술적 아우라를 최대한 발산


- 퐁파두르 부인의 재능과 교양은 뛰어났으며 루이 15세는 그런 그녀를 크게 신임하였음. 퐁파두르 부인은 귀족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며 이 점은 궁궐 귀족들로부터 더욱 심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됨


-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며 왕은 정식 부인이 아닌 그의 예식에 참석할 수 없자 크게 슬퍼하였으며 예술가들 또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낌


코티잔


- 퐁파두르 부인처럼 왕이나 귀족, 권력자의 정부가 된 사람을 코티잔이라고 부름


- 고급 코티잔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교양과 재능, 품성, 센스, 위트를 두루 갖춰야 하였으며 자기 남편의 신분 상승 혹은 지위 상승을 위해서도 다른 남자의 코티잔이 될 수 있었음


매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 고대(古代) 그리스에서는 매춘이 경제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 윤락은 금전이나 기타 재산상의 이익을 얻는 대가로 성행위를 하는 일을 말하며 매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말도 있음


- 고대(古代) 그리스의 창부(娼婦)는 크게 포주에게 예속된 포르나이와 좀 더 독립적으로 활동한 중간층이 창부(娼婦), 그리고 고급 창부(娼婦)인 헤타이라가 있음


- 고대(古代) 로마 또한 부유한 시민일수록 많은 노예를 거느렸으며 주인은 노예를 성적으로 마음껏 착취할 수 있었음


- 중세 이후 기독교 문화의 유럽 지배는 창부(娼婦)를 그림의 주제로 삼는 것을 꺼리게 함


로트레크와 홍등가의 여인들


- 서양 미술사에서 홍등가에서 예술적 영감을 찾은 화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로트레크는 이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화가


오달리스크, 오리엔탈리즘 회화 속 여성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오리엔탈리즘은 애초에 유럽인들의 동방 취미를 나타내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태도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부정적이고 왜곡된 인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 


- 하렘은 본래 이슬람권에서 가까운 친척 외에 일반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을 지칭함


- 하렘의 실권자는 술탄이 아니라 발리데 술탄, 곧 술탄의 어머니로 제 아무리 술탄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음


- 오스만의 목욕탕은 하맘이라 불리며 일종의 사교(社交) 센터였음. 오달리스크와 하렘, 하맘과 함께 많이 그려진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여성 주제는 노예시장으로 성적 가학적 표현이 유럽인들의 판타지를 고양(高揚)시킴


한눈에 읽는 터키의 역사


- 오스만제국(1299~1922)는 13세기 소아시아 지역의 작은 민족에서 시작하여 모로코,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예멘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600여 년 간 지배한 다민족(多民族) 제국


-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와 영토를 대부분 할양하는 내용의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목표로 민족 독립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어 공화(共和)제를 선포하고 1923년 터키 공화(共和)국 성립


사실적으로 표현된 오리엔탈 여성 그림


- 오리엔탈리즘 회화에서 관능적(官能的)인 여성 그림은 매혹적(魅惑的)이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그림


III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


전염병, 죽음의 기사 대륙을 정복하다


- 전염병은 유럽 문명의 행로를 여러 차례 바꾸어 놓았으며 한꺼번에 다중을 쓰러뜨리는 전염병은 공동체에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음


- 유럽 미술의 죽음 주제 가운데 중세 말에 등장한 대표적인 것이 ‘죽음의 춤’ 으로 중세 말 죽음의 보편성(普遍性)에 대한 알레고리를 형성


- 만연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통회(痛悔)하고 참회하자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기자는 쾌락주의적(快樂主義的) 열정을 갖게 되어 예술의 알레고리적 표현 속에 서로 삼투(滲透)


-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은 성인이라는 사실이 14세기에 그에 대한 숭배 열풍을 몰고 옴


역사를 흔든 전염병


- 전염병은 1만 년 전 인류가 농업시대로 진입하면서 본격화되었음. 농업으로 발생한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은 인구의 증가와 집중을 불러왔고, 이는 병원체의 생존에 이상적(理想的)인 조건


- 고대(古代) 그리스, 대제국 로마에도 전염병은 파괴적(破壞的)이고 결정적(決定的)인 영향을 끼침. 가장 악명 높은 전염병은 페스트로 7500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내었음


전염병 수호성인 성 로코


- 전염병으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준 대표적 수호성인인 성 세바스코티아누스 외에도 성 로코와 쌍둥이 형제 성인 코스마스와 다미안이 있음


-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성인(聖人)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기도 함


왕들의 처형, 그들은 왜 심판대에 섰는가? 


-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가 그린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군주의 처형 장면을 가장 인상깊게 전해주는 걸작으로 권력을 장악한 메리가 제인의 처형을 명령하여 1554년 2월 12일 제인의 처형을 그린 그림


-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은 자신의 왕국 스코틀랜드가 아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제임스 1세와 아들 찰스 1세가 청교도 혁명의 와중에 처형되며 메리의 불행이 손자 대에서 다시 반복


- 청교도혁명이라 불리는 영국혁명의 지도자 크롬웰은 청교도의 금욕적이고 엄격한 이미지와 호국경에 올라 펼친 독재 때문에 극단적인 인물로 오해되기도 하나 사실과 다름


- 루이 16세는 죽음 앞에 매우 당당했으며 천성이 선량했으나 왕이 될 자질은 아니었음


- 오스트리아의 명문가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막시밀리안 대공은 1864년 4월 10일 멕시코의 황제로 즉위(卽位)하였으며 공화(共和)파의 손에 붙잡혀 1867년 6월 19일 총살형에 처해짐


역사화의 대가 폴 들라로슈


- 폴 들라로슈는 19세기 최고의 역사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를 주된 소재로 삼아 많은 걸작을 남김


일차세계대전(世界大戰), 바람같이 사라진 한 세대


-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전쟁은 바로 1차 세계 대전으로 영웅들의 투쟁과 희생정신, 애국심에 초점을 맞췄던 이전의 전쟁화(畵)들과 달리 전쟁의 무자비함과 공포, 참혹함이 두드러짐


- 일차세계대전(世界大戰)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시작.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삼국협상 체제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체제 사이의 첨예(尖銳)한 갈등과 대립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음


- 4년 3개월 간의 전쟁에서 유럽 대륙의 사망자 수는 모두 800만 명에 달하며 700만 명이 영구(永久) 장애(障碍)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으며 그 두 배가 넘는 숫자가 중상을 당함


- 일차세계대전(世界大戰)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며 경제적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음. 보통(普通) 여성들도 욕망의 주체로 표현되기 시작. 전쟁에 대한 환멸은 평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낳음


한눈에 읽는 제1차 ·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


- 제 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은 그 배경에 제국주의 열강들의 치열한 경쟁이 있었음.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함으로써 시작되고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끝남


- 제 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은 경제위기에 대처하며 독일은 폴란드 영토를 요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상호(相互)원조(援助)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폴란드를 침공하기에 이르러 이를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세계대전(世界大戰)으로 확대


이차세계대전(世界大戰)의 상흔을 담은 장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


- 이차세계대전(世界大戰) 중 다양한 전쟁그림이 탄생하였고 그 중 장포트리에의 <인질>연작은 독일군 처형장의 경험을 작품으로 남김


IV 정신의 역사, 역사의 정신


카리스마, 사도 바울에서 J. F. 케네디까지


- 서양의 미술가들은 카리스마를 적극적으로 표현. 카리스마라는 그리스어가 처음 문자화되어 나타난 것은 서기(西紀) 50~62년 사이의 일


- 바울은 카리스마는 다양하나 그것을 발생시키는 성령은 하나이고 그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카리스마를 구원(救援)이라고 선포


- 걷지 못하던 사람도 걷게 하는 능력, 그것이 초대 교회가 생각한 카리스마였으나 교회가 유럽 문명에 안착하고 제도화되기 시작하는 서기(西紀) 3세기 이후 급속히 약해짐


-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라는 용어를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재활용하고 개념 자체를 재창조


- 카리스마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며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그 개념과 대상을 확대함


고대(古代) 조각의 카리스마


-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 예술가들은 그 기운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을 만들었음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자본주의(資本主義) 정신을 그리다


- 종교개혁은 유럽의 통일성에 종말을 가져오며 의식과 가치, 문화예술 측면에서도 분열을 가져옴 


-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당시의 종교개혁(宗敎改革)가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전통적인 교회미술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교회에서 성화(聖火)와 성상(聖像)이 사라지게 되었음


- 네덜란드의 시민계층은 우상숭배(偶像崇拜)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된 종교화보다는 자신들의 합리적 태도와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 추구에 맞는 작고 세속적인 그림들을 선호하였으며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가치와의 전적(全的)인 결별은 아니었음


-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신자 모두가 세속에서, 그러니까 일상에서 실천하는 금욕주의의 형태로 발전. 보편적(普遍的)인 생활 원리가 되었음. 이는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가 되었음


- 세속적 금욕주의가 가장 잘 나타나있는 시대의 대표적인 그림은 바니타스 정물화.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허영, 헛됨, 무상함을 뜻함


한눈에 읽는 유럽의 종교개혁


- 종교개혁은 16세기 전반 유럽의 가톨릭 내부에서 일어난 변혁(變革)운동으로 이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원적 지배가 무너지고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일컫는 여러 파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된 근대국가가 탄생


-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칼뱅파, 영국의 수장령 등 다양한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음


기독교와 성상(聖像) 파괴


-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성상 파괴 운동은 8~9세기에 있었던 비잔틴의 성상파괴 운동. 미술품 파괴 운동은 종교개혁 때에도 발생하였으며 종교개혁 당시 츠빙글리와 칼뱅, 카를슈타트 등의 개혁가들은 십계명을 근거로 신자들에게 교회에서 모든 종교적 도상을 제거할 것을 촉구


그리스의 지성, 화포 위로 나들이한 철학자들과 시인들


- 서양 역사화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고대(古代) 그리스의 철인(哲人)과 예술가들을 그리는 것이었으며 서양 문명은 고대(古代) 그리스 문명에 많은 것을 빚짐


-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2년 전 다비닥 다가올 혁명의 파고를 느끼며 그 격랑 속에서 지켜야 할 신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만든 작품


- 서양 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도 많이 그렸지만 문인들과 예술가들도 적지않게 그림. 이렇듯 반복적으로 형상화하여 자신들의 예술이 그 위대한 가치를 얼마나 충실히 드러내고 있는지 늘 성찰


한눈에 읽는 서양철학의 흐름


- 고대(古代)철학은 그리스 중심이었으며 기원전(紀元前) 5세기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발달. 중세시대에는 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역할만을 하였음. 근대로 접어들면서 합리론(合理論)과 경험론(經驗論)이 나타났으며 이를 통합한 것이 칸트. 현대철학은 19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철학을 지칭하며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전개


그리스의 천재 조각가 페이디아스


- 페이디나스는 기원전(紀元前) 5세기 경 가장 뛰어는 조각가 중 한명으로 신상 제작에 뛰어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힘


로마의 지성들과 예술혼들


- 고대(古代) 그리스 뿐만 아니라 고대(古代) 로마의 지성들과 예술혼들도 서양 미술가들의 역사화에 옮겨졌으며 다비드나 들라크루아는 그러한 화가들 중 한 명.


다비드의 역사화, 시대를 초월해 당대를 기록하다


- 서양 역사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고대(古代)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과 그들의 행적이며 이런 고대(古代) 주제의 걸작을 많이 그려 유명해진 화가의 한사람이 바로 19세기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 고대(古代)를 그렸지만 이를 통해 자기 시대를 재해석해보려고 노력하였으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는 자발적(自發的)으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말함


- 자크 루이 다비드는 파리의 넉넉한 중상층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아홉 살 때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부유한 삼촌 덕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음 


- 다비드는 죽을 때까지 굴곡 많은 삶을 살았으며 최종적으로는 브뤼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조용히 후학들을 가르치며 1825년 세상을 떠남


다비드의 역사화를 이은 장 제르맹 드루에


- 다비드가 신고전주의 화가인 까닭에 그림의 구성이 엄격하고 정연. 그의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그대로 이은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장 제르맹 드루에


네이처리즘, 벌거벗고 태어난 인류, 벗는 자유를 외치다


- 누드는 미술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시각적인 아룸다움을 다루는 미술에 대해서 서양 문명은 긍정적으로 발달 


- 네이처리즘, 누디즘이라고 불리는 나체주의(裸體主義) 흐름은 초기에 그 영향을 가장 잘 보여준 화가가 카르히너, 슈미트로틀루프, 헤켈, 뮐러 등 독일의 표현주의자들이였으며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도 자주 그림


- 네이처리스트들에 따르면 네이처리즘은 인간과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나름의 도덕적인 소신과 철학이 반영된 생활문화


- 네이처리즘이라는 단어는 벨기에인 장 바티스트 뤽 플랑숑에 의해 1778년 처음 사용됨 


- 표현주의 화가들이 네이처리즘 주제를 즐겨 그린 시기는 1909~1911년 무렵이며 하나의 운동으로서 정확히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 특정하기는 어려움


-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때는 1920년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네이처리즘으로부터 사회 해체와 계급 없는 세상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면서이며 오늘날 네이처리즘의 실천 양태는 다채로움. 현대미술에서는 설치(設置)미술을 통해 수백 명, 수천 명의 누드가 모이게 하기도 함


공공장소의 누드


- 다중 앞에서 벌거벗는 것은 네이처리스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벌거벗기도 함


- 장난스럽게 가슴이나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플러싱, 위협적 도착(倒錯)적 노출, 벌거벗은 채 공공장소를 달리는 스트리킹 등이 있으며 서양에서는 동양에 비해 대체로 자유로운 노출을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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