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덕일
다산북스
2012.10.12
페이지 326
ISBN 9788963700366
판형 A5, 148*210mm
서문 : 엇갈리는 운명
1장 – 인연의 사람들
운명의 해, 임오년
- 1762년 3월 말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 출사 영조(英祖)는 정재원을 아낌
- 영조(英祖)는 노론(老論)의 전제를 막고자 탕평책을 취했으나 결국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가 됨
- 정재원은 생원시에 급제했으나 사도세자(思悼世子) 문제로 조정이 시끄럽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인 한강변의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로 돌아감
-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훙서 직후 태어난 정약용은 ‘운명적(運命的)’인 만남
눈썹이 세 개인 아이
- 정약용은 세 형이 있었으며, 맏 형은 이복형으로, 이름은 약현, 둘째 형은 약전, 막내 형은 약종으로 어머니 해남 윤씨가 낳은 친형
- 부친 정재원은 부인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자 정약용 열두 살 때 스무살의 잠성 김씨를 후취로 삼음
- 정재원이 환순현감으로 있을 때 정약용은 화순 동림사지에서 형 약전과 함께 공부를 함
- 정약용의 외가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는 문인화의 대가 공재 윤두서로 정약용 형제의 그림솜씨는 외증조부 윤두서의 재능을 물려 받은 것
- 정약용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외가 형제들과 가깝게 지냄
- 정약용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으나 눈썹 한가운데 나누어지는 작은 흔적만 남았을 뿐 순조롭게 치러내고 ‘눈썹이 세 개인 사람’ 이란 뜻의 삼미자(三眉子) 란 호를 짓는 해학을 보임
- 모친 혜경균 홍씨의 친척 홍참판에게 정조(正祖)의 한글 편지를 보냄. 정조(正祖)의 외가인 홍씨 집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연관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음
- 세자의 아들 세손을 둘러싼 분당이 일었고, 노론(老論)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제거하는데 모두 동의하였으며 그 중 세손도 제거해야 한다는 세력은 벽파(僻派)가 되고 세손에게 동정적인 세력은 시파(時派)가 됨
- 영조(英祖)는 세손의 즉위를 막으려 하는 노론(老論) 벽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손의 대리청정 의식을 거행한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남
- 정조(正祖)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임을 선언
아버지와 장인
- 정약용 형제들의 최초의 스승은 아버지 정재원으로 실천으로 자식들에게 본을 보임.
- 정조(正祖)는 정재원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를 보라고 권유하였으나 정재원이 거절
- 정약용이 진주를 방문했을 때 장인 홍화보의 권유로 <의기사기>를 씀
-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는 무과 출신으로 황해도 장연부사로 재직
이익과 희대의 천재 이가환
- 정약용은 조선의 학자들을 연구하면서 큰 학자들에게는 스승이 없다는 점을 발견하고 부친 외에 그가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없으며, 다만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함
- 이가환과 이승훈을 통하여 접한 이익의 사상이 정약용에게 새로운 학문체계인 실학이었기 때문에 다가옴
- 이익 또한 당쟁에 휩쓸리게 됨. 숙종 때 남인(南人)은 청남으로 나뉘어, 1차 예송논쟁 때 조선 왕실을 높이는 왕가의 예법인 3년복설을 주장하였고, 서인들은 1년복설에 패배
- 이익은 형 이잠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되어, 벼슬할 뜻을 버리고 첨성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
- 이익은 사변론을 박차고 실천학문으로 나아갔고, 이익의 학문은 사상계의 혁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음
- 이가환은 이익의 종손으로 문장에 능하고 필법이 뛰어났음. 만년에 천주교(天主敎) 신자가 되어 신유박해 때 생질인 승훈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
- 정조(正祖)는 이가환을 크게 쓰고 싶었으나 증조부가 숙종 때 사형당한 이잠으로 여의치 못하였음
세계 최초의 자청 영세자 이승훈
-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은 남인(南人) 중에서도 베이징까지 가서 영세를 자청하고 천주교(天主敎) 서적을 가져옴
- 이승훈은 천주교(天主敎)가 남인(南人)들의 당학(當學) 내지는 가학(家學)으로 받아들임
- 이익의 서학관은 그 장점만을 취하자는 주체적 수용관
-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칠극』을 언급하며 유학의 극기설과 같다고 전제. 죄악의 뿌리가 되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 등의 일곱 가지를 소개
- 『천주실의』는 1595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한자로 펴낸 서학교리서로, 조선 후기 남인(南人)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줌
- 1601년 마테오 리치가 세운 베이지의 북당에서 이승훈은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음.
- 정약용은 이기경이 서학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서 책을 보내주었지만 이기경이 서학에 공격적인 자세로 돌아서며 둘은 호연(好然)에서 악연(惡緣)으로 변질
자생적 천주교(天主敎) 조직의 지도자 이벽
- 베이징에서 천주교(天主敎) 서적을 구입해온 인물은 매형 이승훈이지만 정약용에게 천주교(天主敎)를 가르쳐준 인물은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
-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처남인(南人) 이벽은 정약용에게 천주교(天主敎)를 가르친 인물로 조선에 자생적으로 천주교(天主敎) 조직을 만듬
- 이벽의 가문은 본래 문관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때부터 무관으로 전환하여 무관으로 지냄. 이벽은 벼슬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아 명산대찰을 찾아다니거나 선비들과 토론을 즐김
- 권철신, 정약전 등은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講學)회를 염
- 강학회는 유교와 천주교(天主敎)가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모여서 개최. 『칠극』은 유교적 수신을 도와주는 교리로 여김
- 이벽의 선교 활동에 중인들은 중요한 대상이였으며 천주교(天主敎) 박해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양반들은 배교(背敎)하였으나 중인들은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마침
2장 – 정조(正祖)와 천주교(天主敎)
정조(正祖)와의 첫 만남
- 서학을 서교로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약용의 친척이었음
- 1783년 정약용은 세자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음
- 1783년 9월 큰아들 학연을 낳았음. 첫딸을 낳자마자 잃은지 만 2년 만
-정조(正祖)는 당대 최고의 학자기도 하여 남인(南人) 천주교(天主敎)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리학이 바로 서면 천주교(天主敎)는 저절로 소멸한다는 논리를 내세움. 이는 정조(正祖)어필의 내용.
- 이황은 사단인 이(理)가 발하고 기(氣)가 따르는 것이라는 이발기수설을 주장하였으며 이이는 기발이승설이라고도 하는, 이(理)가 기(氣)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존재로 보지 않았음
- 정조(正祖)는 남인(南人)이었으면서도 이이의 학설을 지지한 정약용을 칭찬
- 정조(正祖)는 자신이 지지하는 당파라고 무조건 등용하지 않고 시련을 주며 단련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얽히는 인연
- 상소 파문은 이진동이 주도한 영남 남인(南人)들의 승리로 끝나는 듯 하였으나 노론(老論)은 책자 간행을 거부
- 정약용은 노론(老論)에서 죽이려는 이진동을 피신시켜 목숨을 구함
- 정조(正祖)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를 양조 배봉산에서 수원 화성으로 옮긴 다음 자주 찾았으며 정약용에게 배다리의 설계를 맡김
- 정조(正祖)는 정약용에게 시험을 보라는 교지를 내리고 채점하여 김이교와 함께 뽑았으나 정약용은 새벽에 상소문을 올리고 사퇴. 이에 정조(正祖)는 정약용을 해미로 귀양
- 온앙별궁은 조선시대 왕들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종종 행차했던 곳
- 정약용은 임금 부친의 유적지를 가꾸게 하고 이에 정조(正祖)는 칭찬하였지만 노론(老論)들은 경악을 금치 못함
최초의 천주교(天主敎) 사태, 을사추조사건
- 초계문신들은 자신이 읽은 것을 정조(正祖) 앞에서 강의해야 했음.
- 정약용이 태학생으로 있던 1785년 봄, 형조의 금리들이 명례방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를 우연히 목격하여 중인 김범우 집으로 들이닥쳤으며 이것이 조선 천주교(天主敎)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을사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曹 摘發事件)’
-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토대로 전국에서는 반 천주교(天主敎) 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남
- 실학자이며 주자의 정통론에 기울어 있떤 안정복은 『천하고』를 통해 천주교(天主敎)를 비판
- 이벽은 자생적으로 천주교(天主敎)를 받아들였고, 집안은 배교를 권했으나 두문불출하다 1785년 음력 6월 사망
-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조선 서교 관계서 중 가장 초기의 저술로 조선의 기독교 사상을 알게 해주는 사료
- 조상 제사 문제는 조선 천주교(天主敎)인들에게 민감한 관심사로 조선 천주교(天主敎)도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였음
정약용과 친구들의 악연
- 1787년 겨울,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을 만나기 위해 김석태의 집으로 찾아감.
- 셋은 서로의 의관을 정제하고 천주교(天主敎) 의식을 진행.
- 이승훈은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았으며, 이기경과 홍낙안은 모두 주자학을 신봉하는 남인(南人)들이었음. 이에 천주교(天主敎)를 둘러싸고 남인(南人)들도 서학을 받아들인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功西派)로 갈리고 있었음
- 홍낙안은 정조(正祖)에게 천주교(天主敎) 소각을 요청하며 이는 전미반회사건이라고 불림
- 정조(正祖)는 겉으로는 성리학을 신봉하였으나 사상을 억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
-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진사 윤지충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는 소식이 들리며 진산사건이 일어남
- 진산사건을 담당한 전라관찰사 정민시는 시파의 거두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조(正祖) 사후 정순왕후가 집권하면서 삭탈관직 됨
- 정조(正祖)는 ‘위정학(衛正學)’을 주창하며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
-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되고 초기에 느슨하게 대응했던 진산 군수신사원은 유배형에 처해짐
-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 천주교(天主敎)도라는 이유로 사형당한 최초의 인물
이기경, 적으로 돌아서다
- 전라도에서 진산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조정에서는 천주교(天主敎) 서적의 간행 여부 때문에 급박.
- 홍낙안은 여러 사람을 끌어들이며 사건을 키웠음.
- 이승훈은 자신은 성균관에서 서양서를 보지도 않았고, 천주교(天主敎)에 관해 설법하지도 않았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정조(正祖)는 석방
- 의금부로 끌려온 권일선는 홍낙안의 주장을 반박하였으나 천주교(天主敎)에 대해선는 옹호
- 이기경은 채제공과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완전한 적으로 돌아섬
- 그러나 정조(正祖)는 이기경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보냄
3장 – 사도세자(思悼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유산
- 정조(正祖) 16년 1792년 3월 22일 정약용은 홍문관록에 올랐으며 선임과정인 도당회권에도 뽑힘
- 정약용의 홍문관 진입으로 반대론이 일었으나 조정이 변호
- 정조(正祖)의 말대로 ‘팔도액당’의 후손인 정약용이 홍문관에 들어갈 수 없는 객관적 하자가 없으며 이에 정약용은 홍문관 수찬에 제수(除授)
- 창덕궁 주합루는 정조(正祖)가 규장각을 설치한 곳으로 정조(正祖)는 당쟁에 때 묻지 않은 젊은 문신들을 양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세움
- 정조(正祖)는 이황과 유성룡 등 남인(南人)의 정신적 지주를 모시는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치러 영조(英祖) 때의 이인좌 난 이래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던 영남 남인(南人)들을 복권
- 이 때 (別試場)에 입장한 유생은 7,200여 명을 넘었고 시권(試券)이 5천여 장이었으며 모든 영남인(南人)들의 잔치였음.
- 정조(正祖)는 소외된 영남 남인(南人)들을 껴안고 백성들의 불심도 존중하는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려고 하였으나 정조(正祖)의 이런 행보에 노론(老論) 벽파는 위기를 느낌
- 영조(英祖)는 경종 시대 자신과 노론(老論)의 정치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여 소론의 반발을 받음
- 유성한의 상소와 윤구종의 하마 거부 사건으로 영남 남인(南人)들의 분노에 불이 붙음. 이에 그해 윤 4월 27일 1만 57인이 연명한 「영남 만인소」를 작성해 올림
- 영남 만인소는 노론(老論)에 대한 전면적인 선포로 노론(老論)은 이 상소가 정조(正祖)에게 전달되지 못하도록 갖은 방해를 함
정조(正祖)의 선택
- 사도세자(思悼世子)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던 정조(正祖) 16년 4월과 5월, 정약용 부친 정재원 급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도읍, 화성
- 1792년 겨울 여막에 있는 정약용에게 정조(正祖)는 화성의 규제를 작성해 바치라는 명령을 내림. 정약용 설계, 체재공 건축
- 『화성의궤(華城儀軌)』에는 화성의 축조 경위와 역사 전말을 기록한 책으로 순조 1년 간행
- 정조(正祖)는 정약용에게 『도서집성(圖書集成)』이나 『기기도설(奇器圖說)』과 같은 궁중 비장도서를 내려 인중기나 기중기를 설계하도록 함.
- 거중기는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기구이며 녹로는 공사에서 활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데 쓰이던 기구
- 정조(正祖)는 조심태의 제안에 수원의 부호들을 화성으로 이주시키며 최초의 계획적인 상업도시 설계
금등지사의 비밀
- 체재공은 정조(正祖) 대 100여 년 만에 남인(南人)으로서 정승에 발탁된 남인(南人)의 영수로 시종 정조(正祖)를 지지하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다가 노론(老論) 벽파의 많은 공격을 받음
- 김종수는 정조(正祖) 시절 정국의 뇌관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 신원 문제에 대해 사도세자(思悼世子) 신원을 추구하는 것은 영조(英祖)의 역적이란 논리로 맞섬
- 채제공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이 이는 화성의 유수로 재직하며 사도세자(思悼世子) 신원을 마지막임무로 삼았으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상소가 정국을 크게 흔들며 채제공은 사형 위기까지 몰림
4장 – 벼슬길에서
암행어사(暗行御史)(暗行御史) 정약용
- 채제공 상소사건 이듬해 1794년, 정약용은 여막살이를 마침. 정조(正祖)는 그를 홍문관 수찬으로 제수(除授)하였다가 암행어사(暗行御史)(暗行御史)에 제수(除授)
- 정약용과 같이 경기어사로 선발된 인물은 광주,죽산 등의 박윤수, 양천 김포 등의 채홍원 등 열 명이나 되었음
- 정약용은 1794년 10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 적성, 마천 등 네 고을을 돌았음
- 『해서암행일기』는 조선 숙종때 문신 박만정의 자필일기로 당시의 사회상은 물론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활약상을 고차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
- 정약용은 농촌의 빈곤이 구조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특히 서계의 「별단」에서 군역의 모든 폐단이 연천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음을 보고
- 서울로 돌아온 정약용은 서용보를 고하였으나 서용보는 정조(正祖) 사후 정약용에게 처절한 복수를 가함
주문모, 잠입하다
- 압록강에서 북서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황성의 변문은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세관 역할을 하였는데, 주문모 신부는 변문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
- 조문모는 조선에 밀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로 1794년 양력 12월 23일 윤유일의 안내로 입국
-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서 서울에 도착하여 윤유일이 마련해준 서울 북촌 정동에 머물다가 계동으로 옮기고, 여러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식을 행함
- 한영익은 천주교(天主敎)를 극렬 반대하던 이병의 형인 병사 이격에게 중국인 신부의 입국(入國) 사실을 알려주고, 이격은 조정에 알려 그 해 6월 27일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체포령을 내림.
- 강완숙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天主敎) 여교우 회장으로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감추어 두었음
- 최인길, 윤유일과 지황은 신부의 소재를 추궁하는 심한 고문을 당하지만 자백하지 않음
옥책문
-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마치고 돌아온 정약용은 1794년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를 추존하는 상호도감의 도청랑으로 제수(除授)
-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회갑년을 준비하기 위해 채제공과 정약용을 불렀으나 옥책문의 존호문제가 일어남
- 노론(老論)은 사도세자(思悼世子) 문제를 거론하기 꺼렸으며 남인(南人)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높이고자 함
천세, 천세, 천천세
- 1795년 정조(正祖)는 대행사의 왕실(王室) 호위 임무를 맡기기 위하여 정약용을 병조참의에 제수(除授)
- 정조(正祖)는 화성 행차 중 화성의 공자묘를 참배하고 새로 간행한 사서 삼경과 노비를 내려주기도 하며 자신이 유학자임을 천명, 낙남헌에서 무관을 시취해 무관을 급제시키고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줌
- 행차의 참가인원은 약 6천 여 명으로 추락했던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함
- 정조(正祖)는 행사를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계기로 이용
금원의 잔치
- 심환지는 정조(正祖)-순조시대 벽파의 영수로 정조(正祖)와 남인(南人)들에 맞서 싸웠으며 정조(正祖) 사후 남인(南人) 계열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신유사옥에 큰 역할을 담당
- 정조(正祖)는 매년 봄 좋은 날 잔치를 베풀었는데 규장각의 여러 각신과 친척들을 불러 참석시킴. 시작과 낙시를 하며 하루를 즐김
5장 – 지방관으로
노론(老論)의 대 공세
- 노론(老論)에서는 정조(正祖) 19년 7월 4일부터 주문모 신부 사건을 두고 반격에 나섬
- 노론(老論)에서는 정약전을 거들먹거리며 정약용을 목표로 삼고 있었음
- 승지 심환지는 평소에는 노론(老論) 벽파의 당익을 앞세우지 않는 듯한 처신으로 정조(正祖)의 신임을 얻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당익에 앞장
- 이잠을 옹호한 이가환의 상소는 노론(老論)을 자극하였으나 정조(正祖)는 이가환을 옹호
- 정조(正祖)는 정약용과 이가환의 천주교(天主敎) 혐의를 근본적으로 씻기 위해 이가환을 충주목사,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킴
- 이 시기에는 지방 대부분이 점점 사학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며 충주가 가장 심했음
- 노론(老論) 영수 이이명은 천주교(天主敎)와 유교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했으며 노론(老論) 벽파에서 천주교(天主敎)를 무조건 사교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
- 정조(正祖)는 선조 때의 명신 이덕형의 후손인 이기양을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
성호 이익 추모(追慕) 학술대회(學術大會)
- 금정은 충청도 홍주에 소속된 역원으로 천주교(天主敎)가 성행하고 있는 내포에 속한 지역답게 역속 대부분이 천주교(天主敎)를 믿고 있었음
-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정약용은 오랜만에 얻은 시간을 성호 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데 쓰자는 생각을 가짐
- 정약용은 천주교(天主敎) 신자라는 공격을 받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1795년 음력 10월 26일 이삼환, 이명환, 이재위 등 남인(南人)학자들을 봉곡사로 불러 이익의 사상과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을 엶
- 정약용은 금정찰방 시절 퇴계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이황의 저서 『답퇴계서』 를 접한 후 마음의 안정을 찾음
이존창을 체포(逮捕)하다
- 금정 시절 정약용은 천주교(天主敎)를 확실하게 버렸으나 노론(老論)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계속 천주교(天主敎) 신자라고 공격
- 정조(正祖)는 정약용이 기호 지방 천주교(天主敎)계의 중심인물은 이존창을 체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정약용을 중용할 수 있는 명분이 생김을 좋아하였으나 정약용의 태도는 완강
- 정약용의 후임 김이영과 뜻밖에 호응한 인물 노론(老論) 벽파 심환지로 정약용의 서용에 힘을 얻은 정조(正祖)는 정약용에게 근신기간이 끝났다는 공개적인 의사표시인 중화척을 내림
- 정약용의 등용에 의구심을 가진 세력으로 인해 정조(正祖)는 정약용에게 여러 관직을 전전하게 하였음
당초 서학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는데
- 정조(正祖)는 정약용을 성균관 절제의 대독관을 임명하고, 정조(正祖) 재위 21년 6월 22일 동부승지로 임명.
- 정약용은 노론(老論) 벽파에서의 시선을 눈치채고 천주교(天主敎) 관계의 전말을 고백한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림
-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은 일종의 양심선언문으로 정조(正祖)는 이를 이해 하였으나 홍낙안과 이기경 등은 오히려 이 상소가 정약용이 천주교(天主敎) 신자라는 물증이라며 호도
곡산부산에 임용하다
- 조선의 관리 임용법인 삼망은 인사 담당 부서에서 후보자 세 명을 적어 올리면 국왕이 그 이름 위에 점을 찍어 임명하는 것으로 이를 낙점(落點)이라 함
- 정조(正祖)는 곡산부사의 삼망 옆에 자신이 직접 정약용의 이름을 쓰고 그 위에 점을 찍는 첨서낙점을 하여 이례적인 특지(特旨)를 내림
- 정조(正祖)는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던 이유가 그 지역이 천주교(天主敎)가 성행하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곡산은 소요 지역이기 때문에 정약용을 곡산부사로 임용
- 곡산은 이계심을 무죄로 석방 하고 폐단을 없애는 등의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뢰를 쌓음
- 상급관청의 지시를 따를 수 없는 이유를 적는 방보를 통해 노론(老論) 대신들의 표적이 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편을 들어 목민관의 자세를 지킴
-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지방관리(地方官吏)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목민심서』를 완성
끝없는 사건들
- 정약용은 곡산부사 시절 다양한 사건, 사고를 다루고 해결하며 갈등을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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