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조조 모예스
역자 이나경
아르테(arte)
2016.05.23
원제 After You
페이지 536
ISBN 9788950964948
나는 프로답게 어떻게 해석해도 좋을 미소를 지어주고 바로 돌아갔다
들으며 날마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다.
그 애들 부모들은 자기 일이 바쁘거나,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아이들은 진공 상태에 존재하다 보니 나쁜 선택을 하게 돼요.”
슬픔을 벗어나는 여정은 결코 직선이 아니라는 것.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다. 오늘은 그저 나쁜 하루이고, 구부러진 길이니 그 길을 가로질러 살아남으면 된다.
진짜 부모는 아니지만 부모 노릇을 하면서 배우게 된 것이 있다. 어떤 일을 해도 대체로 틀리게 되어 있다는 것. 잔인하거나 무시하거나 불성실하면 아이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것. 지지해주고 사랑해주고 격려해주고 아무리 작은 성과라도, 가령 제시간에 일어나거나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지 않은 것 따위에도 칭찬을 해주면 또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망치게 된다는 것. 내가 친부모가 아닌 부모 역할만 하는 사람인 경우에도 이 모든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 다른 사람을 먹여주고 돌봐주면 적어도 권위를 얻게 되지만, 이 경우에는 그조차도 없다는 것도.
뭔가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 느낌. 전화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뭔가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가서 또 하나 더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든가, 뜻밖의 자유를 만끽하든가. 마치 전기가 들어온 것 같았다.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피할 방법은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가서 커피를 끓이고 회색 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노트북을 꺼냈다.
고프닉 씨께.
루이자 클라크입니다. 지난 달 저를 채용해주셨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지금쯤 일할 사람을 구하셨겠지만, 이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것 같아서 메일을 드립니다.
그곳에서 꼭 일하고 싶습니다. 전 고용주의 아이가 어려운 상태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곧바로 일하겠다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 애를 도와줄 수 있어서 제게는 큰 기쁨이었으니 그 애를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다시 사람이 필요하시면 연락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바쁘신 분인 줄 알고 있으니 긴 말씀 드리지 않겠지만,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병원 의자에서 보내는 시간에는 기묘한 탄성이 있다. 윌의 검사를 기다릴 때는 시간이 금방 갔다. 잡지를 읽고, 전화에서 메시지를 확인하고, 비싼 매점에서 너무 진한 병원 커피를 사 마시고, 주차비를 걱정했다. 이런 일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불평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이제 나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느낄 수도 없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나와 플라스틱 의자, 피 묻은 테니스화가 닿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리놀륨 바닥.
머리 위의 전등은 꾸준히 빠르게 지나다니면서 나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는 간호사들을 비추었다. 들어오고 얼마쯤 지나자 간호사 한 명이 친절하게 화장실을 알려주어서 손을 씻었지만, 손톱 주위에 여전히 샘의 피가 보였다. 잔혹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큐티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의 일부에 그의 일부가 있었다. 그의 일부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형광등 아래서도 아름다웠다. 밖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사람들은 살았고, 점점 더 나아졌으며, 늙어가기를 기대했다. 커피를 사고 지나치게 단 머핀을 먹었는데 태어나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음식 같았다. 부모님께, 트리나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리처드에게 곧 간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릴리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샘이 병원에 있어. 총에 맞았지만 무사해. 네가 카드를 보내주면 좋아할 것 같아. 아니, 바쁘면 문자라도 괜찮아.’
아니면 병원 침대에 환자복 입고 누워 있는 남자를 만나러 왔다가 최고의 취업 제안을 받을 수도 있고. 인생은 그런 거예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기회를 잡아야 해요. 그리고······ 이건 당신의 기회 같아요.”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새벽안개가 상쾌하고 맑은 하늘에 사라지고, 낙엽더미가 이리저리 날아가고, 살짝 썩은 풀에서 풍기는 기분 좋은 냄새. 도시에서는 이 계절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회색 건물과 매연이 일으키는 미기후로 인해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 더웠다 추웠다, 비가 왔다 개는 정도뿐이다. 하지만 옥상에 올라가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저 넓은 하늘뿐만 아니라 릴리가 심은 토마토가 몇 주째 통통하고 붉은 열매를 맺은 것이나, 매달아놓은 딸기 화분에서 이따금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꽃들이 봉오리가 되어 피었다가 지고, 초여름의 싱그러운 녹음은 나뭇가지로 변하거나 잎이 떨어지고 남은 자리로 변했다. 옥상에 올라가면 바람에서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했다. 비행기 한 대가 하늘에 비행운을 남겼다. 전날 저녁에 켜진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고 싶은 말이 백만 가지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 발자국 다가가 사람들이 공항에서 키스하듯이 사랑과 간절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서 여정 내내, 몇 주, 몇 달 동안 받은 사람에게 새겨지는 키스를 했다. 그 키스와 함께 그가 내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보여주려고 했다. 그가 내가 묻고 있는지도 몰랐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함께 있는 것보다 내가 내 자신이 되기를 바라준 것에 감사하려고 했다. 사실 나는 그저 이도 안 닦고 커피를 두 잔이나 가득 마셨다고 말한 것뿐인지도 모른다.
“조심해요.” 내가 말했다. “너무 서둘러서 복귀하지 말아요. 그리고 집 짓는 일도 하지 말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들었고, 나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모습, 몸을 앞으로 숙이는 그의 모습, 머리카락을 비추는 불빛, 늘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내 머릿속에 새겼다. 외로운 날이면 꺼내 볼 수 있도록. 외로운 날이 있을 테니까, 힘든 날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대체 왜 이러고 사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날도 있을 테니까. 그것 모두가 이 모험의 일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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