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웅
부키
2018.01.19
페이지 384
ISBN 9788960516175
우리나라 헌법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다. 인간은 왜 자유로워야 하고, 왜 평등해야 하는가? 세상에는 모자란 사람도 있고, 못된 사람도 있는데 왜 모두에게 자유를 줘야 하고 모두를 동등하게 대해야 할까? 그건 우리 헌법의 출발점이 ‘인간의 존엄성’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이고, 모두가 평등하며,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헌법은 수많은 글자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물 흘리기 좋은 감성적인 소재가 아니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냉철하고 엄중한 과제이자 요구이다. 존엄한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고, 훼손될 경우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한다. 마음대로 짓밟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른 소리를 내는 걸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검찰이라는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조직에게는 불가피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때처럼 유연한지 혹은 의연한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런 소리를 못하게 되었다. 대기원근법이라는 회화 기법이 있다. 대기에는 습기와 먼지 같은 것들의 영향으로 겹겹의 막이 있는데,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 막들의 색채가 우세해져 사물의 윤곽이 흐릿해진다. 대기원근법은 이 원리를 이용해 원근감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결국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물 고유의 색보다 대기의 색에 가까워진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멀리 있는 산은 바로 앞에 있는 산에 비해 대기의 색깔에 가깝다. 공간에만 대기원근법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도 대기원근법이 존재한다. 시간이 쌓이면 자신의 색깔은 사라지고 점차 주변의 색깔에 묻힌다. 그렇게 주변과 비슷해지면 생존에는 유리하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 자신을 고발한 멜레토스에게 묻는다. 청년들을 부패시키지 않고 더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고. 멜레토스는 ‘법률’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누가 법률을 아느냐고 묻는다. 멜레토스는 여기에 있는 재판관들이라고 답한다. 그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남이 모르고 저지른 과실 때문에 고발하여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고, 법이란 그 잘못을 개인적으로 만나 가르쳐주고 타일러주는 것이라고. 멜레토스의 법이 세상을 지배하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실제 19세기 이후 대중들은 복수심과 분노에 가득 차 멜레토스의 법으로 공포의 제국을 세웠다. 하지만 법이란 이름으로 일도양단의 보복적인 처단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정의를 빙자해 자신의 복수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정의의 여신이 휘두르는 칼이 사리 분별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칼을 맞는 것은 사람인지라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진다. 한순간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후회, 그리고 그 칼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올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까닭은 권력을 탐하기 때문이다. 그런 흉계가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욱 키우고 검찰권으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을 누가 손에 쥘 것인가에 대한 피 튀기는 싸움만 낳게 만드는 것이다. 파괴적인 정의의 여신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파괴적인 혁신을 해야 할 시점이다. 데이비드 흄이 말하기를 정의는 이성이나 본능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가 낳은 것이라고 했다.
프레더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가 말하길 국회의원이란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기보다는 한쪽의 시민을 위해 다른 한쪽의 시민을 희생시키는 존재라고 했다. 바스티아가 우리나라에 와봤나 보다. 소름 끼치게 정확하다. 최고 권력자는 권력기관과 관료에 대한 인사권과 정보 독점을 통해 모든 것을 쥐려고 한다. 정치는 그 독점을 해결하려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한 상대 끌어내리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치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통합 리모컨 쟁탈전이다. 자신이 조종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방이 리모컨을 쥐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모두 적이고 폐기 대상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국민도 어느 한쪽에게는 없어져야 할 적이다. 정치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팬덤에 기초한 무비판적인 공감 혹은 반감이다. 프로이트가 말하길 이 세상의 현상을 알고자 한다면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감과 반감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극단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게다가 정치인들이 연출해낸 적대적인 상황은 ‘무관심도 적으로 간주’하는 문화와 ‘공격을 참여라고 생각’하는 돌림병을 낳았다. 적대적인 정치 환경은 무관심할 자유도 주지 않는다. 잘못된 정치에 동조하지 않고 거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할 자유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투표가 세상을 바꾸고, 투표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는 말이 아무런 고려도 없이 주술처럼 떠돈다. 어떤 투표는 나쁜 투표라고 하면서 어떨 때는 국민의 의무라고 강변하는데, 그 차이를 도대체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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