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많이 가보았지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들은 것도 처음이고 그것이 미국대사관의 옆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립의지를 밝히고 2012년 12월 26일 개관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에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한 나라인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모아놓은 건물로,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고, 또 답사를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1870년대부터 1945년 약 70년 간의 근대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물론 그 역사가 아프고 힘든 역사일수도 있고 기쁘고 벅찬 역사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강의를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살펴봤던 과거들이 이 곳에 있었다.
역사관은 총 4개의 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관람료는 무료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전시해설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외국인이 올바른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비록 나는 전시를 들으면서 해설을 듣지는 않았지만, 제 1전시실, 1876년부터 1945년까지의 대한민국 태동기의 역사를 살펴보러 출발하였다.
전시실 입구의 근대시기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한 연표를 보면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부터 1945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외친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오늘 돌아볼 곳들을 연도표로 요약을 해두었다. 짧다면 짧은 70년 기간에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이라는 세계적, 국제적 규모의 전쟁들을 일으켰다. 바로 옆에 있는 일본은 현재에도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독도를 넘보며 계속 우리나라를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앞으로 어떠한 행보를 걷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태극기를 볼 수 있다. 박영효의 태극기로, 구식군인들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임오군란 발생하고 신식군대 별기군의 일본교관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가 전후 설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그때 착안한 태극기라고 한다. 그 당시에 만든 태극기는 전시되어 있지 않았고 그 후 8년 뒤의 태극기를 전시해 놓은 것이라 하는데 127년이 지났다고 한다. 원래는 8괘였는데 너무 복잡한 이유로 4괘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박영효의 태극기와 함께, 강의를 통해 들었던 서유견문을 볼 수 있다.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우리의 근대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대하여 분야별로 분석한 저서로, 당시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의 청의 외교관이 개항기 조선의 외교 정책방향을 논한 의견서인 조선책략도 바로 옆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러한 근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조선 왕실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 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면서 사태의 반전을 꾀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함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대치하였으나 러일 전쟁 후,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은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맺으며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되찾고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구국 활동을 펼쳤지만 1910년 강제로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나라가 병합되었다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나라를 뺏긴다는 것은 그 나라 민족의 수난을 의미했다. 남자는 학도병으로 끌려가고 여자는 위안부 정신대로 끌려갔다. 여기서 현재까지도 가장 크게 이슈화 되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한국 내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이다.'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작은 따옴표를 이용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부에서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인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여자정신대는 일본 정부에 징용되고, 일반의 노동을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 반면 일본군 '위안부'는 일반의 노동 대신에 성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다. '정신대'의 '정신(挺身)'은 '솔선하여 앞장선다'는 뜻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이 제도를 통해 '성적 위안'을 받은, 가해자 일본군 중심의 용어라는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어 일본군 또는 정부의 개입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라는 의미도 있다. 피해 여성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성노예'로 부를 수 있으나 강한 어감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성노예'라는 명칭에 부정적이다. 그들이 당했던 아픈 피해를 도무지 감을 잡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며, 최소한, 이들을 부르는 명확한 명칭이라도 배워야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일본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도 착출해가는데 사물이 문제였으랴. 일본은 전쟁을 위하여 철이란 철은 모두 쓸어갔다. 밑에 보이는 사발은 결전 공출그릇인데,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조선인들의 집에 있는 철과 녹은 있는 대로 다 가져가서 밥 먹을 그릇이 없어 나눠준 그릇이라고 한다. 일본은 인류적, 물질적인 말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말살정책을 펼쳤는데, 그것이 바로 창씨개명이다. 우리는 고유한 성이 있는데 그 성을 강제로 개명해버리는 것이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함께 시행된 한글사용금지는 우리의 정신까지 일본화 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반인류적이고 침탈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역사와 문화를 지키며 현대까지 잘 이끌어 온 것이, 조상님들께 감사드리고, 또 존경스럽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며 전국적으로 많은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3.1운동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는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선언서의 전문을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에 기초를 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독립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철저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던 3.1운동은 전 세계 독립을 꿈꾸는 국가의 국민들 마음을 움직이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집트, 터키, 중국, 인도, 필리핀 등 여러 국가에서 독립 때 3.1 독립 선언서를 차용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상하이 임시정부만 알고 있지만, 상하이 임시정부가 실제로는 상하이를 거처 항저우부터 충칭에 이르기까지 10번에 이르는 이동과정과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독립운동은 비단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 곳곳에서 있었다. 중국에서는 명동학교가 민족 교육에 주력하였고, 신흥무관 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미국에서는 구미위원회가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독립을 위한 구국활동은 일제강점기 35년만인 1945년, 마침내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구선생님은 일본의 항복 이전에 광복군을 참전시켜 한반도 독립문제에 대한 국제적 회의에서 발언권을 갖으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게 되자 크게 낙심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 사진 속 표지판이 보여준다.
사회주의 소련과 자유주의 미국 강대국의 이념에 따라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단이 된 것이다. 개항부터 분단까지 나라에 힘이 없으면 민족이 얼마나 핍박 받고 국토 결정의 자율성조차 뺏긴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찾는 것이 제일이지만,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 외교독립론은 한계를 보였고, 무장투쟁을 벌이기엔 우리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결국, 우리는 외교로도 못했고, 힘으로도 못했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현대시대에 우리는 어떤 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제 2전시실부터 4전시실까지는 대한민국의 기초 확립과 성장과 발전, 선진화와 세계로의 도약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38선이 세워진 후 유엔 총회에서는 UN한국임시위원단 파견과 함께, 2948년 2월에 열린 유엔 소총회의 결정으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가 가능하도록 하여 남한만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선거를 독려하고자 많은 전단지와 홍보가 이루어졌고, 또한 투표용지에 아라비아표기가 아닌 선을 통하여 후보들의 번호를 알 수 있도록 이루어졌다고 한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치루어진 이후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고, 의장으로 이승만, 부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제헌의회로부터 제헌헌법이 제정되고,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아픈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6·25 전쟁이었다. 민족끼리의 싸움. 그러나 민족끼리가 아닌 세계열강의 손아귀에서 치루어진 우리의 아픈 역사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이루어진 전쟁은 UN군의 반격과 중국군의 개입. 그리고 1·4 후퇴를 거쳐 정전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시실의 한 쪽 켠에 마련된 전시물과,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한 구절은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전쟁의 공포와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을 더욱 아프고 슬프게 하였다.
북한의 남침은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당시 스탈린이 스티코프에게 보낸 기밀문서와 마오쩌둥에게 보낸 기밀문서를 살펴보면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당시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였음을 밝혔고, 이는 국제적인 열강들의 계산아래 우리 민족이 희생되어야 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수많은 전투들과, 희생들과, 부상자들이 있고 난 후, 1950년 12월, 국군과 UN군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흥남 철수작전을 꾀한다.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이루어진 이 철수는 피난민 10만을 태우며 심지어 배안에서 5명의 새 생명까지 탄생하였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 기적은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까지 오르며 길이 기억되고 있다.
쫓고 쫓기는 전세 속에, 휴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북진통일을 위하여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을 반대하였고 소련은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휴전안을 거부하였다. 1953년 정전 후 공산군이 다시 침략한다면 16개 UN 참전국 명의로 대규모 제재를 가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며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선언의 대제재선언 또한 이승만은 믿지 못하였으나, 1952년 12월 미국대통령에 조기 종전을 공약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고, 1953년 3월, 전쟁을 계속하려던 스탈린 이 사망하며, 휴전은 급진전의 물살을 타게 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이 되었으나,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정에 제동을 걸기 위해 반공포로를 대규모로 석방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노력으로 결국 대한민국은 주권국가로서 동맹국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과 함께 미국이 일본과 맺은 상호방위조약과 같은 수준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하고, 8월 8일 가조인, 10월 1일 정식조인, 그리고 54년 11월 18일에 발효하게 되었다. 델레스는 상호조약 가조인 이후,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한미상호조약을 통하여 우리나라는 경제적 번영, 민주주의 발전에 울타리 역할,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상비군을 가지게 되었으며, 한반도 유사시 미군이 자동 개입하는 인계철선을 세움으로써 대한민국의 안보보장을 가지고, 미국의 원조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한편 국제외교무대에 당당히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의 휴전과 미국과의 조약체결, 그리고 국제사회의 원조, 교육열을 딛고 일어나는 근대국가의 토대 구축과 전후사회의 대중문화를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 제 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한국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폭압적인 조취를 통하여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연임의 근거를 만들었고, 1954년 11월 이승만은 개헌안을 가결시켜 사사오입 개헌을 하게 된다. 이는 헌법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위헌 헌법 개정이었고, 이승만은 이를 토대로 재선을 하게 되었으며 독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비리는 부패와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확대하여 4·19 혁명에 이르게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4·19 혁명 참가자의 일기를 보자면, 오늘날과 별다를 것 없는 국민이자 시민인데 이렇게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또한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광화문 대규모 촛불시위도 떠올리게 하였다. 4·19 혁명으로 경찰은 시민에게 발포하여 180여명이 숨지는 유혈 참사가 일어났고, 결국에는 이승만은 사임하게 되어 국민이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심판한 민주화의 초석을 세우는 결과를 이루었다.
전후사회의 문화발전상, 우리나라의 발전상은 제 3전시실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었다. 제 3관에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절 우리가 수출하였던 공산품과, 1960년대의 문화론과 문학작품,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물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간혹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1호 라디오나 TV등의 공산품을 볼 수 있었다.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들을 보면서 나도 보았던 것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하면서 추억에 잠길 때, 전태일의 노동권 권리에 대한 전시물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위한 노동운동을 하였던 인권 운동가로 분신자살을 하며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시발점이자 재 확산, 노동조합의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의 노동자들의 현실을 위해 울부짖었던 한사람의 역사를 되새겨 보며, 다음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던 역사와, 군사 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계엄령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던 1980년대의 역사, 그리고 비상계엄조치에 반대하는 광주시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고, 이한열이 뇌사한 사건이 터지면서 불거진 전국 각지의 독재타도 운동 6월 민주항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숨 가빴던 민주화운동을 소개하는 전시품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과 함께, 대통령의 책상, 청와대 단상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통하여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보고 있자니 민주주의의 힘과, 국민 참여에 대한 필요성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윽고 4 전시관에서 민주화의 열기로 숨 가빴던 대한민국이 다시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16년 만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되었고, 이와 같은 민주주의 전진과 대한민국의 선진화, 세계로의 도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1988 서울올림픽과 2002년도 한일월드컵을 비롯한 스포츠 선진강국으로서의 면모와 내가 어렸을 때 했었던 게임과 책들, 그리고 현대에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여러 첨단 기술들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제4전시관의 남북 공동선언문을 끝으로 모든 전시관의 답사를 마쳤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는 입장에서 텍스트가 아니라 그 시대 그 공간에 존재했던 문서,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에 방문한다는 것은 강의로만 듣던 수업이 아닌 실제 눈으로 보며 익히는 유익한 학습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많은 기대가 되었었고, 박물관의 전시를 통해 바라본 근현대사의 발걸음을 되돌아보는 것은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학점을 위한 답사기 작성이기 이전에, 내가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던 분야에 대하여 새롭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 전반적인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학습하게 된 시간이었다. 기존 1,2,3,4 전시관뿐만 아니라 기획전시실에 있었던 위안부 전시와, 한국전쟁에 대한 더욱 명확한 기록인 존 리치 사진전은, 아직 청산되지 못한 우리의 아프고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위안부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우게 해주는 계기였으며, 흐릿한 흑백 자료로만 접하고 쉽게 볼 수 없었던 6·25때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모두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고 배움의 시간이었다. 이렇듯 역사를 맞이하는 모든 시간은 모두가 잊어서는 안되고 우리가 길이길이 기억해야할 보존의 시간이다. 또한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로 나아갈 때 과거의 잘못에서는 배움을 얻는 성찰의 시간이다. 그리고 과거의 찬란한 역사에 대해서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게는 광복후에도 평화가 찾아오지 못했다. 패전한 일본군이 성 착취 사실을 숨기기위하여 피해 여성들을 방치하거나 집단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 중 다수는 주변의 차별속에서 생존을 위한 침묵을 선택해야만 했다. 절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슬픈 일이다. 이에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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