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피터 메더워(Peter Medawar, 1915-1987)는 1963년 영국 BBC 방송의 한 강연에서 매우 논쟁적인 질문을 던졌다. “과학 논문은 조작의 산물인가?”. 메더워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메더워는 과학 논문이 과학적 사실을 허위로 보고하거나 거짓 해석을 제시하지 않음에도 왜 조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학 논문에 제시된 이야기는 과학적 발견을 일구어내는 사유 과정을 완전히 오해하게 하므로 일종의 조작이다. 과학 논문의 귀납적 형식은 폐기돼야 한다.
새로운 연구 성과가 어지럽게 쏟아지는 오늘날 과학계의 현실을 생각할 때, 많은 이들은 연구의 시작에서 최종 발견으로 이어지는 실제 사유 과정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는 메더워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느낄 것이다. 공표 가능한 발견에 이르기까지 연구자가 경험한 실수와 오류를 소상하게 밝히는 일은 과학자들에게도 그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제안이 아니다. 동료심사가 끝난 논문의 경우 과학자들에게 시급한 일은 최종 결과나 그 실험적, 이론적 방법 및 근거를 가장 효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지, 실제 연구 과정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더워의 강연은, 과학의 실제 발견 과정과 그 발견의 제시 방식 사이에 중요한 간극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를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다뤘다는 점에서 좀 더 주의 깊게 분석할 가치가 있다.
조직 이식을 통한 면역 관용에 관한 연구로 196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피터 메더워
영감에서 비롯하는 과학적 발견: 메더워와 포퍼의 반귀납주의적 발견관
메더워에 따르면, 과학 논문의 ‘귀납적 형식’은 과학적 발견으로 이끄는 사유 과정을 완전히 오해하게 한다. 왜 그런가? 그러한 형식의 연구 논문은 흔히 관련 연구 분야를 개괄하는 ‘서론(introduction)’, 논문에서 밝힐 과학적 진리를 어렴풋이 드러낸 이전의 연구를 정리하는 ‘선행연구(previous work)’, 그 진리를 밝히기 위한 ‘방법론(methods)’ 및 그 적용 결과를 오직 사실적으로 보고하는 ‘결과(results)’, 마지막으로 연구 결과로부터 어떤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추론하는 ‘토론(discussion)’ 순으로 구성돼 있다. 메더워가 보기에 이러한 인위적 논문 구성 방식은, 해당 연구 분야의 연구 흐름을 검토하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떠오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을 수행한 후 실험결과를 얻으면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어떤 이론이 도출될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즉 전통적 형식의 논문은 과학자들이 연구 분야의 귀납적 검토를 통해 문제를 이끌어내고 무엇보다 실험결과의 귀납적 해석을 통해 과학적 발견을 성취해내는 듯한 그릇된 인상을 전달한다는 것이 메더워의 비판이었다.
조잡한 형태의 귀납이 함의하는 바는 단순하게 말해 과학적 발견이 … 꾸미거나 윤색하지 않은 감각 증거들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무질서한 사실의 나열에서 질서 있는 이론, 질서 있는 일반적 진술이 어떤 식이건 드러나게 돼 있다.
메더워는 과학 논문에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결과’와 ‘토론’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토론’에서 이론적 함의를 귀납적으로 도출하기 전까지는 짐짓 아무런 기대가 없는 것처럼, 아무런 가정도 하지 않은 것처럼 ‘결과’를 보고하나 메더워가 보기에 이는 전혀 진상이 아니었다1). 메더워에 의하면 모든 과학 연구는 오히려 어떤 기대에서, 어떤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를 추동하는 것은 과학자의 영감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러한 영감의 산물, 즉 과학자의 가설을 실험 등을 통해 “엄밀하게 검사(test)”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요컨대 메더워가 보기에 과학은 상상과 영감을 통해 과학적 아이디어를 착상하는 창의적 활동과, 매우 논리적이고 엄밀하게 가설을 검사하는 비판적 과정으로 이뤄져 있었다. 다수의 검은 까마귀를 관찰함으로써 '까마귀는 검다'라는 일반적 명제를 얻어내는 식의 귀납추론으로는 이러한 과학 활동의 어떤 측면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었다. 과학의 창의성을 설명하기에 귀납추론은 너무 단순했고, 과학의 비판성을 설명하기에 귀납추론은 너무 느슨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이자 반증주의를 제시하여 논리 실증주의에 타격을 가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좌), 상대성이론, 양자역학과 같은 당대 최전선의 물리학 이론을 분석하며 논리 경험주의를 이끈 한스 라이헨바흐(우). 두 사람은 서로 날카롭게 견해차를 보이기도 했으나 많은 이들에 의해 20세기 과학철학사의 거인들로 여겨진다.
메더워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이로 전체주의를 비판한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자이자 논리 실증주의를 비판한 반증주의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를 꼽았다. 실제로 포퍼는 과학적 발견의 순간은 논리적 분석이 가능하지도 않고 어떤 법칙이나 규칙으로 정식화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음악의 주제건, 극적 갈등이건, 과학적 이론이건,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떻게 착상되는가, 하는 문제는 경험 심리학 분야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일 수 있겠으나, 과학 지식에 관한 논리적 분석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논리적 분석은 … 오직 ‘정당성’ 혹은 ‘타당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둔다. …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검토한 결과 및 그 방법을 그 아이디어의 착상 과정과 날카롭게 구별하려고 한다2).
이처럼 포퍼 역시 과학적 발견이 실제로 이뤄지는 과정과 그 발견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구별하고, 전자를 창의로운 상상력과 직관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후자를 논리와 이성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정식화한 점에서 메더워와 유사한 과학철학을 설파하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철학자들이 흔히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별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분석틀은 사실 포퍼가 비판한 당대 논리 실증주의, 논리 경험주의 계열의 철학자들도 널리 공유한 생각이었다. 가령 논리 경험주의의 주창자인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는 자신의 저서 <경험과 예측>(1938)에서 “사유가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 발견의 맥락에 관한 물음은 심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으나 인식론의 관심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인식론에서는 과학적 사고가 펼쳐진 “실제 과정보다는 [그것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한] 논리적 대체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과학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과학철학은 오랫동안 과학적 발견이 실제로 벌어지는 과정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 많은 사실을, 더 적은 개념으로: 휴얼의 역사철학적 발견관
메더워는 과학에 대한 귀납주의적 오해가 널리 퍼진 근원으로 19세기의 대표적 급진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경험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을 지목했다. 메더워에 의하면, 밀은 연역 논리가 지식의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베이컨과 같은 철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며 귀납 논리만이 진정한 과학의 방법, 즉 “일반적인 명제를 발견하고 증명하는 정신의 작용”이라고 주장했다(네이버캐스트 [베이컨주의] 참고). 그러나 19세기에는 밀에 대항한 칼 포퍼의 선구자도 있었다. ‘통섭’이란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휴얼 역시 메더워처럼 발견이란 많은 사실을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을 고안할 수 있는 재능을 바탕으로 하기에 “발견술” 혹은 “진리의 추구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이란 없다고 역설했다. 휴얼은 뉴턴의 만유인력이 낙하하는 사과에서 비롯했다는 통념을 논의하며 사과가 낙하한다는 사실 자체는 뉴턴의 발견의 계기가 되었을 뿐, 진정한 공로는 ‘힘’이라는 새로운 동역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정련한 뉴턴의 영민함, 그의 정신적 힘에 있다고 주장했다. 휴얼이 보기에, 뉴턴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과의 낙하를 목격했으나 그 누구도 만유인력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점은 사실의 단순 집적만으로 진정한 과학적 발견이 유도되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였다.
… 천재성에서 기인한 가장 위대한 성취들을 우리 범인들의 수준으로 격하하려는 저속한 욕망으로 인해, 사람들은 우연한 정황에서 그러한 성취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위대한 발견의 진정한 본성과 그와 관련된 지적 과정을 공정하게 고려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그러한 발견이 우연의 결과라는 견해를 심각하게 고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귀납 논리의 가치와 같은 과학철학의 주제뿐 아니라 정치, 경제, 도덕 등의 광범한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존 스튜어트 밀(좌)과 윌리엄 휴얼(우)
그러나 귀납주의에 반대한 메더워와 달리, 휴얼은 ‘귀납’을 과학적 진보의 핵심 요인으로 간주했다. 문제는 메더워의 귀납 개념이 자신이 반대한 밀의 개념과 유사했던 반면, 휴얼은 메더워나 밀과는 상당히 다르게 귀납 개념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가령 휴얼이 보기에 ‘수성은 타원궤도를 그린다’, ‘금성도 타원궤도를 그린다’, 그리고 ‘지구도, 화성도, 나아가 모든 행성이 타원궤도를 그린다’라고 추론하는 것은 제대로 된 귀납이 아니었다. 진정한 귀납 추론은 ‘타원궤도’라는 정제된 궤도 개념으로 행성의 움직임을 처음으로 묘사했을 때 발생했다. 앞의 밀이나 메더워식의 귀납은 오히려 ‘타원궤도’라는 새로운 개념이 제시된 후 그 근거를 제시하는 사후적 정당화에 가깝다는 것이 휴얼의 역사철학적 평가였다. 이처럼 휴얼은 사실을 통합하는 새로운 개념의 등장에서 귀납의 핵심적 가치를 보았고, 이러한 개념의 역사로 과학사를 재해석했다. 예컨대 천문학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천문학 귀납 일람표’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 이후 천문학사는 궤도나 주기와 같은 케플러까지의 정역학적 개념들이 뉴턴에 의해 행성간 인력, 지구 내 인력, 나아가 만유인력으로 동역학적 종합을 이루는 개념의 상승 역사로 요약될 수 있었다. 즉 휴얼에게 과학사의 진보는 더 많은 현상들이 더 적은 수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귀납적으로’ 수렴해 가는 개념의 논리적 역사였다.
휴얼의 저서 <귀납적 과학의 철학> 2권에 수록된 천문학 귀납 일람표(inductive table of astronomy) 중 일부.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천문학사를 뉴턴이 만유인력 개념으로 총괄하는 과정으로 정리하고 있다. 검은 글씨로는 주요 발견을, 붉은 글씨로는 그 발견자를 기술하고 있다.
이제 휴얼은 시선을 반대로 돌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최종적으로 도달한 개념이 왜 정당한지를 구체적으로 입증(verification)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뉴턴의 만유인력의 정당성은 거기서 연역적으로 유도한 케플러 법칙의 정당성에서 입증할 수 있고, 다시 케플러 법칙의 정당성은 거기서 연역한 모든 행성들의 운동이 관찰 데이터와 일치하는 데서 거듭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휴얼의 과학사는 과학적 개념의 정당성을 역으로 입증해준다는 의미에서도 개념의 논리적 역사라 할 수 있었다. 요컨대 역사의 순방향이 귀납적 발견의 개념사라면, 역사의 역방향은 연역적 정당화의 개념사라는 것이 휴얼의 역사철학적 결론이었다.
저무는 혁명의 시대: 휴얼의 엘리트주의적 과학적 발견의 역사
과학적 발견에 관한 휴얼의 거대한 역사철학적 프로젝트는 소위 혁명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19세기 중반에 등장했다. 실제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까지의 기간은 과학의 역사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거치며 화학을 필두로 물리학과 생물학 등에서 현대적인 연구체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실험실이나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 학파가 등장했고, 이로 인해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다양한 전문적 인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했다. 이러한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는 과학언어의 변화였다. 새로운 전문인력에 상응하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시기를 지나며 지질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와 같은 용어들이 새롭게 도입되거나 현대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과학이 점차 전문적 분과 활동으로 세분되면서 이들에게 전통적 의미의 ‘자연철학자’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영국에서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시인이자 비평가인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철학자란 고결한 단어가 잡다한 실험이나 하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분별없이 쓰이는 것에 분개한 바 있다. 그리고 이에 응하여 1833년 경 ‘과학자(scientist)’란 단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휴얼이었다.
구글엔그램으로 조사한 각 용어들의 사용 빈도 그래프. ‘화학자’나 ‘천문학자’처럼 오랫동안 사용돼 오던 용어들과 달리, ‘물리학자’나 ‘생물학자’ 같은 용어들은 19세기 전반이 지나면서 서서히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학자’라는 용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오랫동안 사용되던 ‘자연철학자’란 용어를 곧바로 대체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추론해 볼 수 있다.
휴얼의 과학적 발견의 철학 역시 이러한 새로운 연구체제의 등장에 맞선 철학적 대응이었다. 휴얼에게 진정한 과학적 발견은 소수의 천재적 엘리트들의 임무였다. 사과의 낙하 현상은 뉴턴 이전의 숱한 범인들에게야 아무 의미 없는 단편적 사실이었을지 모르나 뉴턴에게는 만유인력으로 이어지는 개념적 계기였다. 천문학 귀납 일람표에 담긴 역사가 2천년을 훌쩍 넘김에도 휴얼이 거론한 인물의 수가 20명을 넘지 않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숱한 평범한 연구자들의 노동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발견술을 가르칠 수 없다면 그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전의 사례를 돌이켜 볼 때] 과학의 진보라는 대의는 … 고등수학 연구에 흥미가 있고 그 분야의 훈련을 받은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 어림할 수 없을 만큼 큰 혜택을 입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라도 진리가 갖춰야 할 모든 특징을 지닌 심원하고 경이로운 이론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해보자. 이때 저들은 그 이론의 증거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진득하게 붙들며 관련 계산에 매진함으로써 … 위대한 천재들과 함께 사라졌을 수도 있을 어떤 발견들을 문명세계의 영원한 보물이자 유산의 일부로 바꿔 낸다.
요컨대 휴얼에 따르면 과학은 위대한 개념적 발견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정리, 개선 및 보존 활동으로 양분돼 있고, 소수의 엘리트들이 전자를 이끈다면 연구 학파 등을 통해 훈련된 새 시대의 전문적 연구자들은 후자의 활동에서 직분을 찾아야 했다. 그러므로 과학적 발견의 정수는 진정한 귀납에 있고 이러한 귀납의 과정을 일률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는 말은 소수의 천재들에게만 해당할 뿐, 대다수의 전문 연구자들은 그 천재들의 업적 위에 세워진 개별 분과의 교육을 충실히 따라야 했다. 휴얼의 과학적 발견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엘리트주의적 과학관을 역사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프로젝트였다.
과학 상업화 시대의 과학 발견
피터 메더워가 1963년 강연에서 휴얼과 포퍼의 과학적 발견관을 칭송했음에도 거기에 깔린 그들의 정치적 동기까지 당시 그의 심중에 있지는 않았다. 당시 메더워의 정치적 전선은 엘리트주의적 과학관을 설파하던 휴얼이나 반전체주의적 정치철학을 역설하던 포퍼3)와는 다른 곳에 있었다. 휴얼 시대에 전문화하기 시작한 과학은 100여년이 훌쩍 지난 뒤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힘을 입증했다. 그러나 과학의 문화적,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1960년대 영국은 스노우(C. P. Snow, 1905-1980)에 의해 촉발된 ‘두 문화’ 논쟁이 한창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더워는 상상력과 영감이야말로 과학에 숨을 불어 넣는 생명의 원천임을 강조하며 과학자들이 단순히 사실을 집적하는 기계가 아님을 역설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안하는 창조적 작업이라는 점에서 과학은 문학과 다를 바 없었다. 또한 과학은 비판적 정신을 또 다른 생명소로 한다는 점에서도 문학과 유사했다. 유려한 에세이를 쓰는 데 능했던 메더워는 그 자신이 과학과 문학, 두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탁월한 모범이기도 했다.
무선통신의 선구자 마르코니에게 새로운 삼극 진공관을 보여주고 있는 랭뮤어(좌, 1922년), 동료 여성 과학자 캐서린 블로젯(Katharine Burr Blodgett, 1898-1979)의 실험을 지켜보는 랭뮤어(우, 1946년). 둘 모두 제너럴 일렉트릭의 실험실에서 찍힌 사진이다.
그러나 과학은 상업적 이윤의 원천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염료화학과 전기공학을 통해 산업계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과학자들은 메더워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가 되면 이미 많은 기업의 연구개발 연구소나 실험실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과학자들이 상업적 연구에 종사하기 시작한 이래 과학의 객관성과 사적 이익의 추구는 자주 충돌했기 때문이다. 특히 특허를 둘러싼 우선권 논쟁은 19세기를 거치며 점점 중요한 화두가 되었거니와, 종종 무엇이 발명이고 무엇이 발견인가 하는 쉽지 않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 연구소나 실험실은 과학 발견과 관련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다수의 과학자들과 조력자들이 일정한 조율하에 협력하여 얻은 과학적 발견의 성과는 과연 어떻게 나눠야 하는가? 이 문제는 휴얼이나 밀, 포퍼는 물론이요, 메더워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성격의 문제였다. 2차대전 후 이 문제는 과학 연구의 통제권을 과학계 외부의 정부나 시민사회가 쥐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자들에게 일임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산업계에 기반을 닦은 과학자들 중 미국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제너럴 일렉트릭의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 1881-1957)는 1951년, ‘뜻밖의 행운(serendipity)’이라는 개념을 과학 발견에 관한 담론으로 끌어들였다. 랭뮤어에 따르면 과학의 발견에는 항상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뜻밖의 행운의 요소가 잠복해 있었다. 그러므로 과학 연구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했고, 연구 활동을 내부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하는 일은 과학자들의 자율에 맡겨두어야 했다. 인위적 개입이 가능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과학적 발견이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외부 여건을 잘 만들어 주는 것, 이미 발견된 것을 실용적으로 더 잘 이용하도록 공학적 계획을 수립하는 것. 랭뮤어는 이러한 발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발견한 것들을 호기심에 이끌려 연구를 하던 중 우연히 맞닥뜨린 행운의 산물로 묘사하곤 했다4). 과학 연구의 현실은 점점 집합적이고 조직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나 과학적 발견은 여전히 과학자 개인의 성취로 그려지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적 발견은 더욱 공동 산물의 성격을 띠게 되었거니와, 그 생산의 현장을 지배하는 논리는 20세기 중엽 많은 과학자들을 우려케 한 정치적 논리가 아니라 상업적 논리다. 이러한 현실을 과학자 개인의 영감이나 '뜻밖의 행운'에 기댄 과학적 발견관만으로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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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실험실에는 다양한 실험 도구들로 가득 차 있다. 언제부터 기구를 통해 기계적으로 생산된 데이터가 '객관적인 것'이 되었을까?
현재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들은 주로 크고 작은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며(네이버캐스트 [실험실의 탄생]편 참조), 이 실험실이라는 공간은 여러 가지 실험 도구들과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 분광 광도계나 pH측정기와 같은 비교적 간단한 쓰이는 기구부터 입자가속기와 같은 거대한 장치에 이르기까지, 현대 과학은 다양한 기구들이 쏟아내는 데이터에 의존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실험 기구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을 관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기구로부터 도출된 다양한 종류의 데이터들을 중심으로 자연 현상에 대한 특정한 주장을 제기하고 동료들과 소통한다. 이렇게 실험 기구를 통해 도출된 데이터와 지식은 인간의 선입관이나 편견이 배제되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덕목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추구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구를 통해 '기계적으로 생산된' 데이터를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객관성이 자연과학 활동에서 언제나 추구되어 온 절대적인 덕목이었을까? 저명한 과학사학자 대스턴(Lorraine Daston)과 갤리슨(Peter Galison)은 과학에서 객관성이라는 덕목이 출현하고 추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이며, 당시의 과학 활동 속에서 객관성이 의미하는 바가 특정한 형태로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객관성이라는 개념도 역사를 지닌다는 것이다.
객관성 이전의 과학
객관성이 추구되기 이전에 과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당시 출판되고 유통되던 과학적 도판(scientific atlas)에 담긴 그림들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다. 당대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 대상들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면밀히 살펴보면, 해당 과학자 사회에서 추구되었던 인식적 덕목(epistemic virtue)을 드러낼 수 있다. 대스턴과 갤리슨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자연사학자들(naturalists)이 제작한 과학적 도판을 분석함으로써, 당대 자연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에 충실함(truth-to-nature)"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덕목이 추구되었다고 설명한다.
1737년에 제작된 식물도감에 실린 Campanula folis hastatis dentatis라는 식물의 그림. 당시의 과학적 도판들에 담긴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이 식물 그림 역시 특정 개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해당 식물에 대한 여러 번의 관찰을 통해 해당 종이 나타내는 전형적, 특징적, 보편적 모습을 찾아내어 그려낸 것이다. 식물화로 유명한 자연사학자 Georg Dionysius Ehret가 화가 Jan Wandelaar와 함께 제작한 그림이다.
예컨대, 18세기에 자연사학자들에 의해 제작된 도판들을 살펴보면, 그곳에 담긴 식물 그림들은 특정 개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낸 것이 아니라 해당 식물 종의 전형적인 형태를 대표하는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자연사학자들은 가장 대표성 있는 것을 기준으로 자연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여러 개의 샘플을 관찰한 뒤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모습 뒤에 숨겨진 전형성을 찾아내는 작업에 열중하였다. 당시에 그려진 도판의 그림은 그 어떤 실제 개체보다도 '더욱 진짜인' 것으로, 도판 제작자들은 이를 그려내는 과정에서 가장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존재론적, 미학적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렇게 자연의 규칙성과 법칙성을 찾는 경향은 이전 시기에 추구되던 덕목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것인데, 베이컨의 영향 하에 모든 종류의 이상(異常, anomaly) 현상과 개별적인 독특성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작업에 당대 자연사학자들이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에 충실함", 더 정확히는 자연의 정수(essence)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의 이상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나타내는 도판을 제작하기 위해 자연사학자들은 종종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이상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는 자연사학자들과 달리, 예술가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려는 성향이 있어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자연사학자들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별적인 개체들에서는 완전히 나타나지 않는 자연에서의 규칙성과 법칙성을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의 과학 활동에서 이렇게 이미지를 조작(crafting)하고 이상화(idealization) 하는 작업은 왜곡이라기 보다는 과학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기계적 객관성의 출현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자연에 충실함"이라는 덕목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인식적 덕목이 생겨났다. 이는 1830-40년대에 발명되고 발전한 사진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1850년대를 전후해서 몇몇 자연사학자들은 자연의 전형이나 이상을 드러내기 위해 도판 이미지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로, 유체 역학을 연구하던 물리학자 아더 워팅턴(Arthur Worthington)은 불과 십 수 년 전에 자신이 액체 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튀는 모습에서 발견해 낸 규칙성과 대칭성이 사진술을 통해 얻어지는 이미지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그간 얻어진 자연의 이상적인 모습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모습임을 깨닫는다.
아더 워팅턴이 발표한 연구 성과들. 왼쪽이 1877년 발표된 것으로, 수은 액체가 깨끗한 유리판에 충돌한 직후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를 그린 이미지이다. 오른쪽은 1894년에 발표된 우유 방울의 충돌 모습을 촬영한 사진으로, 이전의 결과물에서 나타나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대칭성과 대비되는 비대칭적인 모습이 연구자 자신을 억제한 "객관적인 것"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19세기 중반 과학자들에게는 그간 얻어진 규칙성과 대칭성이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개입하여 이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 즉 다양한 변이들을 통합시키려는 마음의 산물이라고 이해되었다. 이러한 충격적 깨달음 속에서 당시 학자들은 비대칭적 개별성과 복잡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대 유통되던 과학적 도판을 보면, 이상적인 형태의 자연이 아니라 개별적 특수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다(그림 3 참조). 이제 바람직한 연구자라면, 미학이나 매력적인 이론에의 유혹, 도식화, 아름다움, 단순화에의 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했다. 대신, 엄격한 프로토콜에 따라 각 개체에 대한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생산하는 "기계적" 방식이 선호되었다. 이렇게 자연을 표상할 때 과학자의 주관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과학적 자아의 태도로부터 "기계적 객관성(mechanical objectivity)"이라는 새로운 덕목이 만들어진 것이다.
1893년 Richard Neuhauss에 의해 제작된 눈꽃의 현미경 이미지. 기계적 객관성, 즉 특정 눈꽃 개체가 갖는 모든 특색과 비대칭성을 고스란히 남겨둠으로써 인간의 개입을 최대한 줄인 상태로 자연을 담아내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나 카메라 루시다와 같은 사진 기술들이 부상했는데, 이 같은 기계적 재현 기술들은 처음부터 자연을 더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성 내지 주관성을 상당히 제거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당대 학자들에 의해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다. 기계라는 대상은 지치지 않고 작업할 수 있을 뿐더러, 추측하거나 특정 이론으로 편향되지 않는, 즉 (인간의) 의지로부터의 자유를 제공해주는 존재였다. 즉,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우려되었던 주관성, 즉 과학자의 해석이나 편견의 개입을 거부하는 경향 속에서, 기계적 재현 기술이 그러한 주관성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으로서 간주되고 널리 활용된 것이다. 이처럼 기계 기반의 엄격한 프로토콜은 해석과 이상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과학자 자신의 유혹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되었고,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자취가 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자기억제(self-restraint) 또는 자기삭제(self-elimination)로서의 기계적 객관성이라는 덕목은 바로 이 시기부터 과학 활동에서 중요한 가치로 추구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자기억제는 문자적으로 자기 자신(the self)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개입하고자 하는 과학자 자신의 열망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의 자기 절제 행위에 '객관성'이라는 표지가 붙여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기계적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인식적 덕목이 "자연에 충실함"이라는 이전의 덕목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관찰자의 안목에 기반하여 자연의 이상적인 모습을 발견해내고 바로 그러한 통찰을 도판에 담아내려는 이전 시기의 지적 활동 속에서 기계를 통해 관찰자의 자취를 없애려는 기계적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덕목이 태동하였듯이, 종종 특정한 인식적 덕목은 이전에 열렬히 추구되던 지적 활동에 반하는 경향으로부터 창조되어 새로운 형태의 앎의 양식으로서 공존한다. 지식을 습득하고 보존하는 당대의 도전들에 맞춰 다양한 인식적 덕목이 생겨나고 상호영향을 미치며 진화하는 것이다.
기계적 객관성 이후
이렇게 "기계적 객관성"이라는 인식적 덕목이 생겨나 한동안 우위를 점했지만, 이후 경험과학 분야에서는 기계적 객관성과는 대비되는 또 다른 종류의 인식적 덕목이 등장했다. 이는 "훈련된 판단력(trained judgment)"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러한 새로운 덕목을 체화한 자아는 기계적 객관성 시기의 '의지 없음의 의지'를 지닌 과학적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과학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과학 활동 역시 이전 시기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
20세기 전반기에 들어 과학자들은 점차 기계적 객관성의 한계를 깨닫게 되는데, 기계적 객관성 하에 만들어진 개별적 이미지들은 종 전체의 특성을 담아내거나 종 간의 차이를 드러내기가 어렵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또한, 과학 활동에 있어서 주관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과학적 자료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목적도 달성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이제 과학적 도판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객관성의 한계가 빈번히 지적되면서, 이와 함께 '과학적으로 보는 것', 즉 과학자의 판단과 해석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1959년Robert Howard, Vaclav Bumba, and Sara Smith에 의해 생산된 태양 자기장에 관한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를 제작하거나 판독하는 과정에는 이와 관련된 다양한 전문 지식과 판단 능력이 요구된다.
당시 도판 제작자로서 가져야 할 능력은 목적에 맞게 이미지를 다듬고 분류할 수 있는, 일종의 인상학적 통찰력(physiognomic sight)이었다. 예컨대, 그림 4와 같은 태양의 자기장에 관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복잡한 장비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에 데이터에 대한 "주관적" 작업이 더해져야 한다. 예컨대, 연구자가 기구적 오류들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해석을 내리는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처럼 20세기의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과학자들은 이미지에 미묘하게 개입하여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추출하거나 기입하면서 이미지를 수정하고 재정의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한 분류와 취급을 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절차와 규칙 대신, 훈련을 통해 잘 연마된 판단과 직관이 필요했다. 즉, 이전 시기와 달리, 일상적인 과학 활동에서 경험과 훈련을 거쳐 습득된 전문적이고 암묵적인 지식과 판단 능력이 필수적인 요소로 부상했다(네이버캐스트 [암묵지]편 참조).
물론, 이렇게 등장한 "훈련된 판단력"이라는 인식적 덕목 역시 이전의 "기계적 객관성"을 완전히 대체한 것이 아니라 보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험에 기반하여 훈련된 판단력을 갖춘 전문가들은 "객관적" 기구들을 거부하기 보다는, 판단을 머물게 하는 기반으로서 그러한 기구들로부터 도출된 공유 가능한 데이터들과 이미지들을 이용하게 된다. 이제 재현의 책임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에게 부과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또 다른 이미지의 역할이 나타나고 이로부터 또 다른 모습의 과학 활동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나노과학 분야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이미지들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읽어내는 재현(representation)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자연에 특정한 입력을 가하고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출력을 보여주는 과정(process)으로서의 이미지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더 이상 증거가 아니라 도구이며, 나노 조작의 세계에서 도판에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 아니라, 특정 도구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도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IBM의 연구자Donald Eigler와 Erhard Schweizer가 주사 터널링 현미경(STM, scanning tunneling microscope)을 이용해 35개의 Xenon 원자들의 위치를 조작하여 만든 IBM 로고. 나노사이즈로 만들어진 이 로고는 원자 하나 하나를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STM의 강력한 능력을 보여준다.
변화하는 덕목, 다양한 과학들
이렇게 과학 분야에서는 시기에 따라, 또 분야별로 다양한 덕목들이 추구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객관성이라는 특정한 덕목이 과학 활동에서 추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며, 기계적으로 생산된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그것의 의미 역시 당시 과학자들이 지향하던 과학적 자아의 모습과 맞물려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이라는 덕목이 과학 활동에서 추구되어 온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도 아니며, 역사적으로 또 분야와 지역에 따라 과학자들이 지적 작업에서 추구하는 덕목들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이라는 가치가 그간 특히 강조되어 온 까닭은, 그간의 지적 활동에서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주관성, 즉 지식의 주체에 대한 공포가 다른 것들보다 더욱 강렬하고 근원적인 것으로 발휘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성 외에도 정확성, 정량성, 교육적 유용성 등 다양한 덕목들이 과학 활동에서 추구될 수 있으며, 이렇게 보면 "과학=객관성"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그만큼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의 통일된 '과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하위 문화를 지닌, 즉 제각각의 언어와 관습, 작업 스타일, 지식 체계, 증거 형태 등을 갖는 다양한 '과학들'로서 공존한다. 갤리슨은 과학의 힘은 과학의 균일성이나 통일성(unity)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하위 문화의 얽힘, 즉 과학의 잡종성과 불통일성(disunity)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계속되는 하위 문화의 상호작용 속에서 과학의 모습, 과학자가 추구해야 할 덕목은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Daston, L. and P. Galison (2007), Objectivity, Zone Books.
홍성욱 (2007), "과학은 이론, 실험, 기구가 얽혀 발전한다: 피터 갤리슨", 이상욱, 홍성욱, 장대익, 이중원 지음 (2007), [과학으로 생각한다], 동아시아.
CBC의 How to Think about Science 방송, Peter Galison과의 인터뷰 (2010. 1. 14):
실험실은 과학 지식이 생산되는 장소인 동시에 과학자를 키워내는 인큐베이터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자가 되기 원하는 학생들은 대학교의 관련 학부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는데, 보통 이때부터 수년간의 실험실 생활이 시작된다.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대학원생들은 실제 연구에 참여하면서, 교과서나 강의를 통해 배울 수 없었던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으며 과학자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교과서나 강의를 통해 배울 수 없는 지식과 기술이란 무엇일까? 실험실에 갓 들어간 학생은 논문에 제시된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실험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에 대한 책만 읽으면 자전거를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실제 실험의 과정은 교과서나 논문의 학습을 통해 배우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식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 외에도 암묵지(tacit knowledge)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빙하의 아랫부분처럼, 암묵지는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드러나지 않는 지식을 뜻한다.
책이나 논문의 학습이 아닌 과학적 실행으로 체득되는암묵지
자전거 타기를 배우려면, 자전거를 타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는 것보다 시행착오를 거쳐 자전거 타기를 경험해 봐야 한다. <출처: gettyimages>
암묵지란 경험과 학습을 통하여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명료하게 공식화되거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뜻한다. 정형화되고 문자화된 지식인 형식지와 달리, 암묵지는 언어로표현할 수 없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책이나 논문을 통해 습득될 수 없다. 실험 계획을 세우는 방법부터 실험 장치를 설치하고 실험 기구를 다루는 방법, 실제 실험 과정에서 시약을 혼합하는 시점이나 속도 등 다양한 조건을 조절하거나 중간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노하우, 실험 데이터를 취사선택하여 해석하고 표나 그래프와 같은 시각적 자료로 전환하는 작업 등, 교과서나 강의에서는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실험에 성공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정보와 기술은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암묵지는 실험실에서 동료들과 생활하면서 실제 실행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직접 수행하는 경험을 통해 체득된다. 우리나라 실험실에서는 선배와 후배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중요한데, 이 때 전수되는 대부분의 지식은 책이나 논문에는 담겨있지 않은 암묵지인 것이다.
과학적 발견은 개인적, 암묵적 지식에 기초해 이루어진다
암묵지 개념은 헝가리 출신의 물리화학자이자 철학자인 폴라니(Michael Polanyi, 1891~1976)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폴라니는 과학 교재나 이론에 담겨 있는 명시적인 지식 이외에, 과학자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는 개인적이고 암묵적인 지식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칭했다.
헝가리 출신의 물리화학자이자 철학자인 폴라니는 과학적 발견에 있어서 과학 이론에 담겨 있는 명시적인 지식 외에, 과학자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는 개인적이고 암묵적인 지식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암묵지라 칭했다.
폴라니에 의하면,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은 탐침으로 어두운 동굴을 탐사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실체를 알아볼 수 없는 동굴이 인식의 초점(목표)이라면, 우리는 동굴의 여러 부분을 탐침 끝으로 더듬어 탐사한다. 이 때, 우리는 탐침을 잡고 있는 손과 근육의 느낌이라는 보조적 인식에 의존해서 동굴이라는 대상을 알게 된다. 즉, 앎의 과정은 보조적인 세부 내용들을 핵심 목표에 통합하여 전체의 패턴과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중심에 대한 보조 부분의 관계는 서로를 통합하려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형성된다. 과학적 발견은 이러한 암묵적 통합을 이루어내는 개인적 인식에 기초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폴라니의 설명에서, 지식은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분리된 채 주체가 대상을 수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대상을 신체 내부로 통합하거나 대상을 포함할 수 있도록 신체를 확장하는 능동적인 참여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법을 한 번 배우면 세월이 흘러도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처럼, 과학자는 자신의 감각과 기술을 활용하여 과학적 발견에 이르는 과정을 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학이 바로 이러한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과 암묵적인 과정에 의존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라 설명했다.
암묵지는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까?
실험실에서 과학자는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암묵지를 체득하게 된다.<출처: gettyimages>
이렇게 과학 지식에 있어서 암묵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실험이 복제되거나 지식이 전수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한다. 과학기술학자인 콜린스(Harry M. Collins, 1943~)는 1970년대 초 TEA 레이저(Transversely Excited Atmospheric Pressure CO2 Laser) 기술의 전파 과정을 연구하면서, 과학 지식이 전달되는 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TEA 레이저를 처음으로 개발한 캐나다 국방 연구 실험실은 다른 연구팀에서도 이를 만들 수 있도록 그 설계도를 공개했고, 이후 여러 연구소에서 TEA 레이저를 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연구팀들 중에 공식적인 문서에만 의존해서 레이저의 조립에 성공한 경우는 없었으며, 전화 통화나 직접적인 방문을 통해 캐나다 국방 연구 실험실과 비공식적인 “접촉”을 가진 연구팀만이 TEA 레이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TEA 레이저를 성공적으로 복제하기 위해서도 문자화된 정보뿐 아니라 사적이고 장인적인 지식인 암묵지의 전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암묵지는 문서를 통해 학습될 수 없으며 접촉을 통해서만 전수될 수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다. 콜린스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다른 과학자들에게 말해지지 않거나 과학 학술지의 공간상 싣기 어려운 세부 내용들도 암묵지에 해당하지만, 때로는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암묵지도 존재한다. 어떤 암묵지는 해당 분야의 과학이 발전하면 인식 가능해지고 언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실험이 실행되면서 그와 관련된 기술의 일부는 항상 암묵적 지식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암묵지 때문에 특정한 실험에 성공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실험에 숙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예상하기도 힘들다.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암묵지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내심과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콜린스는 새로운 실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암묵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암묵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기간이나 노력을 인식하는 것이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의 전수를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암묵지와 형식지의 상호작용
암묵지는 과학 지식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지식 영역에 대한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직에서의 지식 공유와 증대에 관심을 둔 경영학 분야에서는 암묵지와 형식지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일본의 경영학자인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郎)에 따르면, 암묵지는 크게 기술적 기능(technical skill)과 인지적 기능(cognitive skill)으로 나눌 수 있다. 기술적 기능은 장인의 노하우와 같이 몸에 체화된 전문성을 의미하는데,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얻어진다. 인지적 기능은 사고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패러다임이나 조직의 관행과 같이 개인의 정신적 틀로 기능하는 특정한 가정이나 관점, 사고방식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기업에서의 암묵지는 주로 현장의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쌓인 경험적 지식이나 '육감'이다. 이러한 개인적 지식이 조직 차원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지식으로 변환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암묵지는 언어와 문서, 몸짓 등 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해 전달, 공유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언어의 형태로 명시화(articulation)됨으로써 형식지로 변환된다. 또한, 형식지의 의미를 내면화하고 현실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암묵지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암묵지와 형식지의 상호 순환작용을 통해 조직의 지식은 증대된다. 노나카는 이러한 지식창조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조직의 혁신을 이루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후 암묵지는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이라는 경영학의 한 분야에서 핵심 이슈가 되었다.
형식지와 암묵지의 상호작용. 지식 창조의 기본은 암묵지와 형식지의 순환이다. 암묵지에서 형식지로의 변환과정은 표출화(externalization), 형식지에서 암묵지로의 변환과정은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할 수 있다. 표출화의 과정에는 메타포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며, 내면화의 과정에는 체험이 중요하다.
참고문헌: Collins, H. M., [The TEA Set: Tacit Knowledge and Scientific Networks], Science Studies, Vol. 4, 1974, pp. 165~186; Nonaka, Ikujiro,Managing Organizational Knowledge Creation, 김형동 옮김,[지식창조의 경영],21세기북스, 1995; Polanyi, M., 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마이클 폴라니 저, 표재명, 김봉미 옮김, [개인적 지식: 후기비판적 철학을 향하여], 아카넷, 2001.
과학 논문의 ‘귀납적 형식’은 과학적 발견으로 이끄는 사유 과정을 완전히 오해하게 한다. 왜 그런가? 그러한 형식의 연구 논문은 흔히 관련 연구 분야를 개괄하는 ‘서론(introduction)’, 논문에서 밝힐 과학적 진리를 어렴풋이 드러낸 이전의 연구를 정리하는 ‘선행연구(previous work)’, 그 진리를 밝히기 위한 ‘방법론(methods)’ 및 그 적용 결과를 오직 사실적으로 보고하는 ‘결과(results)’, 마지막으로 연구 결과로부터 어떤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추론하는 ‘토론(discussion)’ 순으로 구성돼 있다. 메더워가 보기에 이러한 인위적 논문 구성 방식은, 해당 연구 분야의 연구 흐름을 검토하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떠오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을 수행한 후 실험결과를 얻으면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어떤 이론이 도출될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즉 전통적 형식의 논문은 과학자들이 연구 분야의 귀납적 검토를 통해 문제를 이끌어내고 무엇보다 실험결과의 귀납적 해석을 통해 과학적 발견을 성취해내는 듯
과학은 미지의 영역을 탐구한다.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것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는동안에 체계적으로 배제된 지식의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선가 모르는 채로 남겨진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기술학자들은 이렇게 만들어 질 수 있었지만 특정한 이유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과학 지식을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라고 정의한다.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연구되지 않는 과학 연구 영역을 언던 사이언스라고 한다. <출처: gettyimages>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연구되지 않은 과학, 언던 사이언스
요즘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화학물질의 인체 유해 여부에 대한 논란은 언던 사이언스의영역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화학물질이 갖는 산업적 잠재성에 대한 연구는 계속해서 증대되어 이뤄지는 데 반해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는 체계적으로 무시되거나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탐구되는 것이다. 미국의 과학기술학자이자 과학운동가인 데이비드 헤스(David Hess)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연구되지 않는 과학 연구 영역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라고 불렀다.
언던 사이언스의 개념은 과학기술에 대한 페미니즘(feminism) 연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70년대부터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우리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 현대 과학의 연구 과정과 여기에 사용되는 용어와 은유를 분석해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별(sex difference)과 젠더(gender), 인종 등에 대한 당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관점들이 과학 연구에 스며들어 편향된 연구를 낳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페미니즘 연구들은 당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관점들이 과학 연구에 스며들어 편향된 연구를 낳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출처: gettyimages>
성 호르몬에 대한 사례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여성 호르몬(estrogen)과 남성 호르몬(testosterone)이라고 부르는 성 호르몬(sex hormone)은 남, 녀 모두에게 존재한다. 그렇지만 당시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굳게 믿고 있던 초기 호르몬 연구자들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남성 호르몬, 여성 호르몬과 같은 용어들이 도입되었다. 반면에 당시 남성 호르몬이라 불리는 테스토스테론을 발견하는 데 공헌한 네덜란드의 내분비학자 에른스트 라쿼(Ernst Laqueur)는 성차에 관계 없이 존재하는 물질에 성 호르몬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이 용어의 사용을 비판했다. 그는 '스테로이드(steroids)'라는 중립적인 용어로 이 호르몬들을 부르자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과학계에 수용되지 않았고, 그 결과 이후 약 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성 호르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과학 지식에 대한 탐구가 남성과 같은 특권적 집단의 문화적 가정과 관심에 의존해서 이뤄지면서, 주류 과학자들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된 분야는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무지의 종류들
언던 사이언스는 만들어 질 수 있었지만 만들어지지 않았던 지식(혹은 비지식)이라는 의미에서 단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 환경사회학자 마티아스 그로스(Matthias Gross)가 무지를 분류한 것을 보면 언던 사이언스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모르는 영역을 무식(nescience), 무지(ignorance), 비지식(non-knowledge), 네거티브 지식(negative knowledge)으로 구분한다.
먼저 무식은 어떠한 지식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급작스럽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연구자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무식을 자각하게 되면 그 주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데, 이 상황에서 아직 얻지는 못했지만 연구를 통해 얻기를 희망하는 대상이 바로 비지식이다. 그리고 특정 영역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돌이켜 보는 것이 무지의 상태이다. 이 무지의 영역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다시 연구 의제가 되어 미래의 지식을 목표로 하는 비지식이 되지만,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연구의 수행이 지식 생산자의 특권을 위협한다고 생각될 경우에 이러한 주제는 연구되지 않은 채로 잊혀진다. 그로스는 이것을 네거티브 지식이라고 명명했는데, 언던 사이언스는 이런 네거티브 지식에 해당된다. 예산 담당자나 연구자들이 사소한 문제로 간주하면서 그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잊혀지는 주제인 것이다.
무지의 유형과 그 종류에 따른 지식 생산과의 상관관계. 언던 사이언스는 사소하거나 위험한 주제로 간주되어 연구에서 배제되고, 체계적으로 지식 생산을 차단당하는네거티브 지식에 해당된다.
언던 사이언스와 시민 사회 연구
데이비드 헤스에 따르면 보통 사회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주장들과 그들이 강조하는 과학적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은 지식으로 간주되며, 과학 지식의 생산 주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무시된다. 여기서 체계적 무시라는 말은 정부의 과학연구의 예산 배분 선정 과정이나 과학자들의 연구 선택 등 과학 연구 체계 내에서 중요하지 않은 탐구 주제로 간주되고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을 지적하면서 헤스는 시민 사회 운동가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동료평가에 기반한 전통적인 과학지식 생산방식과 다른 형태로 과학지식을 생산하는 작업들을 촉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중심부 과학 패러다임 바깥에서 사회 운동가들이 사회 의제 해결을 위해진행하는 과학 연구들을 '시민 사회 연구(civil society research)'라고 부르면서, 시민 사회 연구의 증가가 과학을 더 건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더 많은 국가의 예산 투여를 요구한다.
1980년대 이래로 세계 각지에서 과학적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시민 운동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 같은 사회운동은 언던 사이언스를 드러내고 연구하게 만들 촉진제가 된다.
<출처:(CC)샛길 at Wikipedia.org(왼쪽),(CC)riekhavoc at Wikipedia.org(오른쪽)>.
언던 사이언스에 기초한 시민 사회 연구론은 과학운동 방법의 새로운 대안이다. 1970~1980년대에 이뤄진 대안과학기술운동, 급진적 과학운동, 그리고 신과학운동 등은 모두 현 과학체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파괴적이거나 낭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며 이에 대한 변화나 전복을 요구했다. 반면 언던 사이언스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초한 시민 사회 연구는 현대 과학의 세계관이나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과학의 연구 과정 중 현 사회의 복잡한 관계들 때문에 배제되거나 사소한 것으로 간주된 네거티브 지식을 탐구해야 할 대상으로 바꾸고 이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언던 사이언스 주창자들은 어떤 연구가 수행되지 않는지, 그리고 그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이를 드러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과학
언던 사이언스가 그리는 미래는 보다 건강한 과학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배경의 개인들과 집단들이 합심하여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연구 분야들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계이다. 언던 사이언스에 대한 논의들은 우리의 과학이 경제 성장이라는 슬로건에 종속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의 세상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 우리의 과학 연구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없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 더 느리게' 과학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동광, [상업화와 과학기술지식의 생산양식 변화], <문화/과학> 겨울호, 2012; 한재각, 장영배, [과학기술 시민참여의 새로운 유형 : 수행되지 않은 과학 하기], <과학기술학연구> 9, 2009; David Hess, [The Potentials and Limitations of Civil Society Research: Getting Undone Science Done], 79, 2009; Matthias Gross, [The Unknown in Porcess: Dynamic Connections of Ignorance, Non-Knowledge and Related Concepts], 55, 2007; Scott Frickel et al., [Undone Science: Charting Social Movement and Civil Society Challenges to Research Agenda Setting], 3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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