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액션, 드라마, 스릴러 / 미국, 독일 / 139분 / 1999.11.13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진 : 브래드 피트(테일러 더든), 에드워드 노튼(나레이터)
잠에서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과제를 하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만나고 다시 잠을 자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며,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라는 일반적이고 당연시되는 윤리교육을 받아온 나에게 이번 영화는 꽤나 충격적이기도 하고 파격적이기도 했다. 일반 평사무원이었던 직장인이 이런 평범함에 실증을 느끼고 무기력했던 주인공은 깊숙했던 내면과 조우하여 새로운 자아를 찾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자유는 진정한 자유였을까?
‘주인공’이 가짜 환자가 되어 결핍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나가 일시적으로 불면증을 치료 받을 때에는 어떤가? ‘주인공’은 이러한 모임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안정을 찾아나간다. 이러한 모습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과 같이 거짓으로 모임에 참여하는 ‘말라’를 봤을 때 그는 그녀의 행동으로부터 자신의 행동의 허위성에 양심을 찔리게 되고, 이러한 모임으로부터 얻는 자유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왜 그렇게 됐을까? 찰스 테일러에 의하면 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성’ 혹은 ‘진정성’으로부터 개인의 도덕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이점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진실성에 대해 허위성과 가식적임을 느끼게 되고 결국 이러한 생활을 끝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심론에 따르며 우리가 계속적으로 ‘바른 길’을 걷게 하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지만 그렇게 강한 힘이 아니라고 했듯이 이를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이 ‘타일러 더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겪는 자유의 쾌락을 느끼게 됨으로써 양심은 둘째문제로 제쳐버리게 되었으니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당장 아침에 무엇을 입을지, 먹을지 말지, 먹는다면 무엇을 먹을지부터 할지 안할지, 갈지 안할지 등 매사 모든 문제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그래서인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최종훈’ 교수의 인생교훈이 한번 이슈화가 된 적이 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최종훈’ 교수
이러한 인생교훈은 많은 선택사항들에 우유부단해진 현대인들에게 편리한 행동규범이라도 되는 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교훈을 주었다. 이렇듯 선택의 기로에서 주인공 ‘주인공’은 결핍과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해결하고자 하지만 ‘말라’의 등장으로 인해 본인의 행동이 가식적이고 허위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직장을 버리고 (결국엔 자신의또 다른 자아가 운영한 것이긴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파이트 클럽에 적응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해결하게 되었다.
결핍적인 사람들의 모임으로부터 자신의 삶에 만족감을 느끼게 되고 해소하게 되는 선택도 그렇지만 ‘주인공’이 파이트 클럽을 선택하는 점에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현대사회의 물질문명과 복잡한 소비욕, 욕구에 대한 불만들을 왜 굳이 이러한 선택을 통해서 해결했어야 했었나.
현대인들은 소유와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모습, 성과 쾌락 등에 대해 끊임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숨기고 윤리교육을 받아온 자신은 그런 주제에 대해 찔리지 않고 문제가 없다는 듯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위 ‘펑펑’ 폭발하고 부서지며 터지는 내용의 블록버스터가 박스오피스 순위에 오르고 “남의 싸움구경이 제일 재밌는 구경이다.” 라는 말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 UFC와 같은 이종격투기를 보여 사람들은 열광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은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고 불만이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대한 내용인 ‘굿 가이 컴플렉스(Good Guy Complex)’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주인공’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타일러 더든’은 ‘주인공’과 정반대의 성향을 띄는 인물이다. 거침없이, 숨김없이 자신의 인생관과 욕망을 드러내며 ‘주인공’은 이러한 모습에 이끌리고 점점 동화되어 간다. 그리고 틈틈이 파이트 클럽을 통해 본능적인 욕구들을 드러내고 표현하며 몸은 망가져 가지만 정신적인 자유를 찾아간다. 영화는 무정부적이며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이성과 본성, 질서와 무질서,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주인공’이라는 하나의 인물에 두 가지 인격을 부여하여 고민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잘 조화된 자아를 가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신명령론에 의하면 신은 우리가 복종해야할 일련의 의무들을 정식화 했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자’로써 그것을 따르지 않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롭게 살면 되겠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던 의문과 일맥상통하여 연결하면, ‘주인공’의 이러한 자유의 대한 갈망은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자유라는 이름과 목적 아래 ‘쾌락’으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해 버리는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의 오류도 행하고 있다. 결국 파이트 클럽에서 욕구불만을 풀며 그들만의 규칙을 정하고 지켜나가며 스스로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얽매고 쾌락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유를 찾는다는 자기합리화에서 도덕적인 규범을 깨버리고 폭력성과 파괴성을 여과 없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문에 나와 있듯 절제의 규칙에 대한 바로 그 집착, 과잉의 기피 그 자체가 바로 그 자신의 과잉을 낳게 되는 셈이다. 일상의 탈출구가 있다는 점에서는 좋겠지만 자신의 자유를 위한, 자유에 의한 쾌락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행해나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주인공’ 또한 이러한 반사회적인 관념과 행동에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이미 파이트 클럽은 명성을 얻고 이미 이곳저곳에 지부화와 군대화가 완료되어있는 상태이다. 뒤늦게 본인의 자아를 깨달은 ‘주인공’은 ‘타일러 더든’의 계획에 당하고 오히려 맹목적으로 ‘타일러 더든’을 따르는 집단에 의해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들이 만든 클럽은 사회적으로 탈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고, 모임을 형성하며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분출할 수 없었던,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품고 있을 욕구를 마음껏 드러내며 자유와 열정을 되찾는 장소였고 집합체였다. 그렇지만 그들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집합체인 파이트 클럽에서의 특별한 정체성과 이러한 자유의 쾌락으로 인해 파이트 클럽의 사람들은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수준을 벗어나 자신의 신념으로 굳히고 ‘타일러 더든’의 말이 곧 법이 된 이들에게 칸트의 정식은 적용되지 못했고, 왜곡하여 자기기만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를 찾고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단일적이고 지배적인 정체성만을 갖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아를 찾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사람을 구분할 체계나 분류주제는 국적이든 문화든 직업이든 다양하며 이 다양한 카테고리들은 삶의 관련성을 짓는다. 파이트 클럽의 사람들은 이러한 분류 중 하나의 우선 분할체계로 인해 하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자신들만의 생각을 고집하고 사람들의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엔 거대한 테러리스트 집단이 되고 말았다. 결국 본인의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의 내용에 대해 모든 것들에 비판적인 시선은 아니다. ‘크리스토퍼 팔존’의 ‘영화가 된 철학’에서는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성과 비이성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며 도덕과 자기이익 사이의 갈등을 조화롭게 풀고(물론 플라톤은 도덕과 자기 이익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도덕적 삶을 살고자 해야 하며, 실제로 도덕적 삶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행복하기까지 하다. 말은 그렇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의 문제와 일맥상통하듯 ‘김상봉’은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에서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은 언제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외적권위에 대한 순종과 예의로 이해되어 왔다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영화에서 ‘주인공’이 파이트 클럽의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기’ 라는 숙제를 직장 상사인 ‘리차드’에게 해결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물론 그 해결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는 잘못하긴 했지만 우리들의 꽉 막힌 현실에 대해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였다.
또한 ‘타일러 더든’과 ‘주인공’이 상가를 침범하여 젊은 아시아계 남자인 ‘레이먼 헤셀’을 총으로 위협하며 본연의 꿈을 찾게 해주는 장면은 현실과 타협하고 꿈을 가지고 있어도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모습에 대해 성찰의 계기가 되어준다. ‘타일러 더든’의 “지금 죽는다 치고, 네 삶을 한 번 평가해 봐.” 라는 대사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힘들겠다는 의지로 점점 불꽃이 사그라들던 나에게 ‘과연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번은 하면서 살았었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었고, 또한 ‘타일러 더든’의 ‘내일은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거야.’ 라는 대사는 ‘꿈을 쫓아가는 이의 행복을 나는 느껴본 적이 있었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였고 정신적 공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 꿈에 대한 환상을 깨지 않고 꿈이 아닌 현실로 이루어 내자는 동기부여의 계기가 되었다.
사랑에 관한 내용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주인공’과 ‘말라’의 사랑은 난잡하고 추잡하기에 그지없다. 더군다나 사랑과 성에 관해 유난히도 엄격하고 유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남녀가 길거리에서 번호 한번 교환했다고 만나고 서로 몸을 섞는 상황은 아마 유교적 사상이 짙은 노인들이 본다면 천인공노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말라는 사랑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라는 말에 ‘타일러 더든’은 “이건 사랑이 아니라 스포츠야”라고 맞받아친다. 이를 인식하듯 ‘말라’ 또한 “콘돔은 현대의 유리구두야. 낯선 사람 만날 때 신고 밤새 놀다가 벗어던지잖아.” 라며 퇴폐적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타일러 더든’과 ‘말라’와의 관계를 보면 단지 육체적 쾌락만을 위한 관계처럼 보인다. 음란한 신음소리나 ‘말라’의 알몸이 그대로 보이는 여과 없는 슬로우 모션 촬영기법으로 표현한 장면들이 그들의 육체적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의 쾌락을 탐닉하고 타락한 듯 한 이 둘의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들에게도 사랑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인스턴트식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타일러 더든’이 말했듯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스포츠, 유흥이다. 인간은 상호 인간적인 결합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는 가장 강력한 욕구이다. 따라서 고립을 극복하고 타인과 결합할 방법을 찾는 것은 전 시대에 걸친 하나의 고민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결합이라 하면 어떤 결합을 뜻하는가?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통합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결합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고립감과 고독감을 극복케 하는 한편, 개성과 통합성을 지켜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라’가 두 남자(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일러 더든’, 혹은 ‘주인공’과 ‘말라’가 나눈 사랑은 그 의미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이 본연의 완전한 자아를 찾고 ‘말라’와 손을 잡게 되는 순간에 그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서로 일체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연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영화 내에서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자세를 강조한다. “TV를 통해 우린 누구나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 밖에 없다.” 혹은, “진정한 자유를 느끼려면 모든 걸 다 잃어봐야 해.”라는 대사에서나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한다.”와 같은 대사에서 물질문명과 현대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하도록 한다. 버스에서 모델들의 캘빈클라인 속옷 광고를 보며 던진 대사 “캘빈클라인의 노예들” 이라는 대사는 어떠한가? ‘짐멜’이 말했듯이 분명 돈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모든 인격적인 것들을 유보하고, 분리와 거리를 강조하는 개인 및 집단의 행위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공통성을 형성한다. 하지만 부와 명예, 돈은 인간으로써, 인격적인 존재로써 최고의 선을 구현하기 위해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현대문명사회에서는 돈이 그 자체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다. 더군다나 돈이 많으면 품위 있는 인간이 되고 벌어들인 돈은 결국 개인의 능력의 척도가 되어 한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성된 현대문명에 탈출하기 위해서, 즉 자유를 위한 이들의 노력은 파이트 클럽으로 표현되고 이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폭력적이고 무정부주의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자유가 쾌락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성과 본성의 균형을 맞춘,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초토화 작전을 취소하려 동분서주하던 ‘주인공’은 자신이 바로 그 ‘타일러 더든’이란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주인공’은 진짜 나를 알게 되고, 주차장에서 자신과 혼자서 싸우는 장면으로서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느낄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이름의 중요성이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폴슨 그의 이름은 로버트 폴슨, 그의 이름은 로버트 폴슨, 그의 이름은 로버트 폴슨...” 이라며 죽음 동료의 이름을 함께 외치며 존엄성을 깨닫게 되는 장면과, 또 다른 장면은, 장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인공’(에드워드 노튼 분)이라고 표시한 주인공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코넬리우스’, ‘루퍼트’, ‘트래비스’ 등 다양한 가명은 등장하지만 이렇게 주인공의 진짜 이름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결국엔 이름이 가지는 정체성의 중요성과 ‘주인공’의 자아를 드러내지 않음을 표현한다. 그러다 또 다른 자신, 또 다른 주인공 ‘타일러 더든’을 죽이고 허상과 거짓된 자아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렇게 새로운 모습의 ‘주인공’은 ‘말라’와 손을 잡고 도시의 건물들이 폭발하는 것을 보며 막을 내린다.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우리’로 승화한 것이다. 손을 잡은 이들의 뒷모습에서는 ‘내가 이렇게 새로운 내가 되었으니 관객 너희들도 새로운 너희들이 되어라’‘ 라는 듯한 비장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이들의 뒷모습이 흐려지면서 1초도 안되게 등장하는 마지막 필름인 적나라하게 드러난 남성의 하반신은 물질문명, 소비행태, 자유를 향한 갈망 등과 같은 주제와는 별개로 이 시대에 혼란스럽고 변질되어가는 남성상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러면 우리는 영화가 제시해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응답해주면 된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냉철하게 성찰하고 열심히 고심해야 할 때이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총을 쏘며 말했듯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는 무엇이고 우리의 자아는 안정한지, ‘눈을 뜰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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